그 시대의 풍경이 떠오르는 음악들 <사랑은 창밖에 빗물 같아요> <당신은 어디 있나요>등등 80년대 후반 특유의 여린 목소리로 그 시절의 애절한 감성을 노래했던 가수 양수경에 대해 이야기해볼까합니다.
당시 그녀의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발표하는 곡들마다 대박을 치며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여성 가수로 발돋움했습니다.
또한 이때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진출하여 한류라는 단어가 생소했을 그 당시에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가수로서 양수경의 삶은 그야말로 불꽃처럼 화려했습니다.
이처럼 가수 양수경을 빼고는 90년대 초반 가요계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누구보다 화려했던 그녀였 는데요.
가수로서 잘나갔던 그녀의 삶과 달리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인간 양수경의 삶은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깊은 슬픔으로 가득해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많이 쏟아져야 했습니다.
그녀는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음반 제작자이자 소속사 회장이었던 故 변두석과 결혼하여 주식 부자로 불리며 연예인 주식 부자 3위까지 올랐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큰 돈을 하루 아침에 모두 날리고 설상가상 남편마저 스스로 생을 마감한 후 이후 채권자들 입에서 차마 담을 수 없는 험한 말들이 나오자 자신의 재산이 0원이라고 호소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던 동생마저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자 남은 두조카들을 입양하며 하루 아침에 3명의 아이를 둔 미망인이 되어버린 양수경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65년 전남 순천시에서 2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가게도 없이 리어카에 생선을 싣고 다니며 장사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했고 이후 한참 후에야 고생 끝에 작은 생선 가게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때는 부모님이 생선 장사하는 게 너무 부끄럽고 싫어서 훗날 그녀는 데뷔하자마자 부모님의 생선 장사를 그만두게 했는데요.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땐 그게 왜 부끄러워서 그만두게 했는지 참 후회가 된다고 했습니다.
한편 어릴 적부터 남들보다 예뻐 본인 스스로 주목을 많이 받는다는 걸 알았던 그녀는 그때부터 가수와 톱스타를 꿈꾸게 되는데 그래서 중학교 이후부터는 그 어린 나이에 가수는 신비로워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신비로운 이미지를 위해 남들 다 가는 떡볶이를 먹으러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심지어 카페도 훗날 나이 50이 다 돼서야 처음 가봤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어려서부터 가수를 꿈꿨던 그녀가 19살때 이선희가 <J에게>로 대상을 탔던 1984년 강변가요제에 참가했지만 예선에서 떨어지고 말았고 또한 고3의 나이로 운 좋게 음반을 발표하긴 했으나 그것마저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1986년 KBS가 주최한 <신인무대>라는 프로에서 마침내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이후 가수 박강성이 작곡한 <바라볼 수 없는 그대>가 결국 대박을 치며 점차 인기 가수로서의 자리를 매김하게 됩니다.
그렇게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 <사랑은 차가운 유혹> 등 수많은 그녀의 곡들이 가요톱텐에서 5주 이상 1위를 하며 가요계를 대표하는 여자 가수로 발돋움하게 되며 그야말로 가요계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90년대를 주름 잡으며 남부러울 것 없는 인기를 누렸던 그녀가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소속사 사장이었던 故 변두섭 회장과 깜짝 결혼 발표를 하고는 돌연 연예계를 떠나버리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 변두섭은 서태지, 이승철, 싸이, 룰라 등의 스타를 배출한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기획사 사장이었는데요.
그런데 어느 순간 연예 기획사 사업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자원개발 사업에 뛰어들어 원전 사업을 확장해 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수경이 남편의 회사 주식을 취득해 부잣집 사모님으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때 2008년 매입 당시 한 주당 300원 꼴이었던 주식이 단 1년 만에 2천 원으로 뛰자 부부가 전략 매각하면서 한때 연예인 주식 부자 3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가수로서 뿐만 아니라 주식으로도 엄청난 돈을 벌며 그야말로 모든 것이 탄탄대로 꽃길만 펼쳐지던 그 시기 하지만 이후 그녀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여러 악재들이 일어나면서 영원할 것 같던 그녀의 꽃길은 지옥의 길로 향하게 됩니다.
당시 유난히 딸바보였던 양수경의 아버지가 어느날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 뒤 갑자기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던 그녀는 이를 극복하고자 하와이로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그녀와 함께 살던 친동생마저 평소 우울증으로 너무 힘들어하자 하와이에 있던 그녀가 전화로 다독인 지 불과 몇시간 만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당시 그녀는 사랑하는 가족을 연달아 잃차 결국 심한 공황장애가 오고 말았고 심지어 이 때 공황장애를 겪어도 너무 심하게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마치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몇 년간의 기억이 좀처럼 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동생이 떠난 뒤 남겨진 조카 2명을 입양해 원래 아들 하나에서 세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그녀의 일기장에는 잠든 세아이를 눕히고 미친 여자처럼 밤 하늘만 바라본다라고 적혀 있을 정도로 너무나도 힘든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남편의 사업은 날로 승승장구하며 이때도 여전히 그녀는 부자였고 하지만 욕심이 과했던 건지 당시 이들 부부를 둘러싼 각종 여러 가지 의혹과 논란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게 됩니다.
그녀가 주식 부자 3위가 되었던 것도 그 돈을 수많은 개인 투자자들이 막대한 손해를 입었기 때문에 벌었던 것이었는데요.
그래서 당시에도 이와 관련해 논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결국 남편의 사업이 힘들어져 남편은 회사에도 알리지 않고 회삿돈까지 횡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2013년 그녀의 남편은 결국 자신의 사무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인생의 울타리였던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이후 양수경 그녀는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남편의 빚까지 일부를 떠안게 되면서 그렇게 잘 살던 그녀가 이후부터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자 당시 그녀가 채권자들에게 했던 말이 미안하지만 현재는 재산이 0원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양수경 그녀가 고백하길 “남편이 사라지고 나서 내 곁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 사람이 있을 때와 없을 땐 정말 다른 세상이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게 힘들었고 말을 꺼내기가 무서웠다.”
“그렇게 몇 년을 캄캄한 어둠 속에 보낸 후 나마저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만 몇 번이나 들었지만 하지만 나는 엄마이기에 차마 나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후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는데 처음엔 사업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래서 늘 머릿속으로 내가 잘하는 일이 뭘까 눈 감는 날까지 후회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고민한 결과 결국 답은 노래였고 그래 나는 가수 양수경이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후 우연한 기회로 20년이라는 시간을 돌고 돌아 마이크를 다시 잡게 되었고 그때 나는 역시 이게 나였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무대에 서서 팬들을 만나고 싶고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가수 양수경이라는 이름을 되찾으면서 스쳐 지나간 추억의 가수가 아니라 지금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공감을 줄 수 있는 현재 진행형 가수가 되고 싶다”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그녀의 노래 <사랑은 창밖의 빗물 같아요>을 그리워하며 즐겨듣는 팬들이 많습니다. 과거의 슬픔을 딛고 앞으로 그녀의 노래를 자주 들을 수 있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