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 이경에 유쾌하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1980년대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개그우먼입니다.
바로 엊그제이죠. 방송에 나와서 차마 말 못할 그간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아 사람들의 응원과 위로를 받고 있다고 하는데요.
심지어 페트병을 주우러 돌아다닐 정도라니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유쾌하고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이미지이지만 사실 그녀는 매우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 이유 중에는 술과 노름을 좋아했던 그녀의 아버지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덕분에 생활력이 강했던 그녀의 어머니가 행상으로 생활비를 벌어 작은 집을 마련하고 일곱 식구의 생계를 유지하며 간간히 살아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게 마련한 집을 아버지가 노름으로 한순간에 날리게 되었고 결국 어머니가 10년간 힘겹게 마련한 집도 잃게 되고 일곱 식구가 망우동 단칸방으로 쫓겨나서 살았다고 합니다.
거기에 집안의 빚쟁이들까지 수시로 들이닥치니 어머니는 충격으로 정신 이상까지 생기며 극단적인 시도를 5번이나 시도할 정도로 집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절망적이었다고 합니다.
다섯 남매 중 셋째였던 이경애 씨는 다른 형제들보다 일찍이 철이 들어 충격으로 정신이 반쯤 나가서 극단적인 시도를 하려는 어머니를 말리며 내가 돈 많이 벌어서 호강시켜 드릴 테니 제발 죽지 말라고 빌었다고 합니다.
한때는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입양을 가게 될 뻔한 적도 있을 정도였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 가족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겠다고 어린 나이에 굳게 다짐한 이경애 씨 14살 때부터 수세미나 코코아 등을 방문판매로 팔러 다니기도 하는 등 어린 나이에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두 부모님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니 이경애 씨가 실질적인 가장의 논술을 하게 된 것이죠. 어린 나이에 말입니다.
어려웠던 집안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 후 학비가 없어서 중학교 입학도 하지 못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든 그녀 이후 코미디언이 되기로 결심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치열하게 살았던 이경애 씨 마음만 먹으면 뭔들 못할까요?
1984년 KBS 개그콘테스트에서 수상을 하며 화려하게 데뷔를 하였고 유머 1번지 쇼 비디오자키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돈을 벌기 시작한 그녀 반지하였던 집에서 17 평짜리로 옮기고 나중에는 서른네 평짜리로 이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이제 조금 살만해지는 걸까요? 코미디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던 그녀 실제로 당시 그녀의 수입은 상당했습니다.
그녀의 일곱 식구를 부양하기에도 충분할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여기에도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있었으니 그녀가 연예인을 하면 받은 수익들 모두 그녀의 아버지가 관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경애 씨가 아버지에게 돈을 드리는 게 아닌 아버지 본인이 직접 이경애 씨의 수입에 관한 모든 걸 관리하였으며, 어머니나 이경애 씨에게 용돈을 주거나 하지도 않았다고 하네요.
여기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인데 안타깝게도 이 아버지가 나름 뭘 해보겠다고 생각했는지 주식에 대해 전혀 몰랐던 아버지였는데 남의 말만 듣고 덜컥 파산한 은행의 주식을 사서 또 모든 것을 날렸다고 합니다.
흔히 갑자기 큰돈을 벌게 되면 주변에 사기꾼 같은 똥파리들이 꼬인다고 하죠. 그런 것에 당한 것일까요? 아무튼 인기 코미디언이 되어서 이제 좀 살림이 나아지나 했습니다만 그것도 잠시 어렵게 마련한 집 두 채를 빼고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모조리 날리게 됩니다.
그런데 불행은 또 여기서 끝나지 않고 얼마 뒤 아버지는 암에 걸리게 되고 어머니는 간경화가 심해 지게 되면서 부모님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게 됩니다.
당시 미리 보험 같은 걸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이경애 씨 가뜩이나 남은 재산도 없었는데 중환자인 두 부모님의 병원비를 도저히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고 합니다.
대략 1주일에 870만 원씩 나갔을 정도라니 말이죠. 부모님 간병하랴 병원비 신경쓰랴 그야말로 앞이 깜깜해지는 상황 아마 반쯤은 정신이 나간 상태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5년을 앓다 결국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그러는 동안 가진 집 두 채를 모두 팔아도 감당이 안 되었던 병원비용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삶에 의욕까지 모두 없어져 버렸다는 이경애 씨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고자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다니 게다가 이제는 아무도 없고 홀로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결국 이경애 씨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이경애 씨는 첫 번째 남편을 만나 이혼의 아픔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혼 후 근거 없는 헛소문은 퍼져나갔고 그녀의 동료들조차 그녀의 뒷담화를 하면서 흉을 보았다고 하는데요.
유일하게 선배 개그맨인 이마룡 씨가 이경애 씨를 보호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마룡 씨는 이경애 씨의 뒷담화를 하던 후배를 보고 너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직접 봤어라고 후배를 혼을 내주었다고 하니 이마룡 씨가 참으로 멋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튼 첫 번째 이혼의 아픔을 뒤로 하고 이후에 14살 연상의 남편과 재혼을 하게 된 이영애 씨 두 사람 다 한 번씩 이혼의 아픔을 겪은 사람으로서 이제야말로 자상한 남편과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려나 싶었습니다.
원래는 임신을 할 수가 없었지만 시험관 아기로 인공수정의 두 번째 시도 끝에 어렵게 딸이 태어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소리 없이 다가온다고 했었나요? 행복도 잠시 이경애 씨는 교통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잠깐 세워둔 이경애 씨 그런데 뒤에서 졸음운전을 하던 차가 이경애 씨를 그대로 받아버린 것입니다.
왼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고 관절이 탈골되는 대형 사고였습니다.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여기에 더해 이번엔 남편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게 됩니다.
간에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인데요. 결국 이경애 씨는 자신의 재활 치료를 포기하고 남편의 간병에 매달렸습니다.
덕분에 남편의 건강은 차츰 회복이 되고 있었지만 이경애 씨는 재활 치료를 제대로 못한 탓에 몸 오른쪽이 마비가 되는 증상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역시 문제는 돈 이런 상황에서 이경애 씨는 병원비를 벌기 위해서 불편한 몸으로 일을 하러 다녔다고 하니 이경애 씨는 정말 강인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런 이경애 씨의 노력 끝에 남편은 건강을 회복 하는 듯싶었지만 이후 다시 차츰 간이 나빠지면서 결국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제의 이경애 씨에게 남은 사람은 오직 딸 하나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한동안 술에 빠져 살았던 그녀이지만 딸 때문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급한 마음에 이것저것 사업을 했지만, 이마저도 모두 망해버리니 이쯤 되면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운도 없는 이경애 씨입니다.
최근 이 3년 갑자기 건강까지도 급격히 악화가 되고 코로나니 뭐니 세상이 혼란스러우니 이대로 내가 죽으면 혼자 남은 딸은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던 이경애 씨 조금은 엉뚱하게도 갑자기 전쟁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살기 위해 미리 비상식량을 모아놔야 한다며 온 동네에 쓰레기를 뒤지며 페트병을 모으러 다니게 됩니다.
쌀과 같은 식량을 보관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식량을 정말로 지리산 쪽에다가 숨겨놓기까지 했었다니 당시 이경애 씨가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을 해봅니다.
동네에서 갑자기 쓰레기를 모아놓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딸도 너무 이상하게 보였다고 했으니 말이죠.
조금은 엉뚱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경애씨의 행동들 생각해보면 일평생을 좀 나아질 만하면 예상치 못한 불행이 찾아오고 또 나아질 만하면 또 불행이 찾아오는 그런 인생의 반복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뿐인 딸을 위해서라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딸을 지켜주기 위해서 그런 행동들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행히 딸은 착하게 잘 자라고 있고 이경희 씨의 최근 사업도 잘 풀리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불행한 일이 없이 딸과 함께 행복한 일만 가득하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