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뜻을 따르려 했지만 도저히 안됐다…” 서울대 졸업 후 치과의사하다 32살에 최고 영화배우가 된 남배우의 정체

1928년에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교회에서 성극의 단역을 맡으면서 연극의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중학생이 된 이후부터 배우의 길을 걷기 위해 노력했으나, 오디션에서 연이어 탈락하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배우 신영균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극단을 따라다니며 연극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극단이 세트를 실은 트럭에 배우들과 그 가족들을 태우고 힘든 여정을 떠나는 모습에 ‘이런 삶을 계속하면 가족들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학업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여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현재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개인 병원을 개업해 상당한 수익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연극배우 시절의 동료들이 치과 치료를 받으러 오면서 그의 연기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켰고,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설득하여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후 32세의 나이에 첫 영화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았고, 이어지는 작품들이 큰 성공을 거두어 당대의 유명한 영화배우로 자리 잡았습니다.

신영균은 약 300편의 영화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청룡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세 차례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1978년 <화조>를 끝으로 개인 사업과 정치 활동으로 인해 영화배우로서의 경력을 접게 되었습니다.

1977년에는 명동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인 명보극장을 인수하였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1991년에는 한국맥도널드의 한국 법인인 신맥을 설립하여 현금으로만 500억 원이 넘는 개인 재산을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신영균은 2011년에 대중문화예술상에서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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