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그동안 어떻게 숨기고 살았어..” 유재석도 깜짝 놀란 36년만에 공개된 조향조 아내의 충격적인 정체

나에게 기회가 올 때, 어떻게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기회는 세 번씩이나 찾아온다고들 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을까? 이런 생각에 방황하기도 합니다. 가수 조항조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주었습니다. 그의 성공 과정은 극적이었고,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의 치열했던 삶과 헌신적으로 그를 보살핀 그의 아내 이야기를 전해보려 합니다. 나아가 긴 무명 시절을 딛고 성공한 조항조 씨와 유재석 씨의 놀라운 공통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조항조 씨를 트로트 가수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락 밴드의 보컬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과거 활동 사진을 보면 민소매 옷을 입고 파격적인 헤어스타일을 한 조항조 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록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록가수의 풍모를 지녔습니다. 조항조 씨는 미 8군 부대와 클럽 등에서 무대 활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는데, 당시 클럽에서 받는 돈은 단 3만 원이었고, 그 중 2만 원은 멤버들의 여관비로 써야 했으며, 나머지 1만 원도 나눠 가져야 했습니다. 이렇게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무대 활동을 이어간 이유는 오직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 열정 하나로 1978년에 리드보컬로 데뷔하지만, 그 밴드 역시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가수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조항조 씨는 어느 날 자신의 집에 심부름을 온 재미교포 여학생에게 첫눈에 반합니다. 그 여학생이 바로 지금의 아내 홍숙재 씨입니다. 당시 그녀가 한국에 돌아간다고 하자, 조항조 씨의 이종사촌 이모님이 무언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셨고, 홍숙재 씨는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조항조 씨의 집을 찾았습니다. 미국에서 온 홍숙재 씨의 세련된 모습에 반한 조항조 씨는 그녀와 교제를 시작했고, 그녀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연애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조항조 씨는 홍숙재 씨 집안의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녀가 대학생 신분으로도 한국에 여러 번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집안이 꽤 유복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딸이 한국의 무명 가수와 교제하는 것을 부모님들이 달가워할 리 없었겠지요.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결국 두 사람은 결혼에 성공하게 됩니다.

결혼 후 아들까지 낳은 조항조 씨는 처음으로 가장의 무게를 느끼게 됩니다. 당시 그의 월 수입은 15만 원 정도였다고 합니다. 80년대 초중반에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다면, 15만 원은 결코 큰돈이 아니었습니다. 새 가족을 부양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죠. 가장으로서 자신의 경제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항조 씨는 결국 그토록 사랑하던 음악을 포기하고 미국 이민을 결심하게 됩니다. 10년 동안의 무명 가수 생활을 정리하는 순간이었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이런 결정을 할 때까지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항조 씨의 아내는 남편에게 음악을 열심히 하라고만 했지, 돈을 더 벌어오라는 말이나 수입에 대한 불만을 표한 적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조항조 씨는 미국 이민을 결심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혼자 음악에 빠져 살면서 너무 내 생각만 하는 건 아닌지, 내 고집대로 살아왔던 건 아닌지 가족들에게 미칠 듯이 미안하더라고요.” 10년의 무명생활을 감당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지만, 그보다 소중한 가족을 위해 과감히 음악을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은 결심으로 한국을 떠난 조항조 씨가 어떻게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을까요? 그 배경에는 아내 홍숙재 씨의 결단력이 있었습니다. 홍숙재 씨는 조항조 씨가 미국 이민을 가자고 말했을 때, 그의 눈빛이 무섭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 눈빛에서 음악으로 인해 상처받은 남편의 마음을 읽었던 것이죠. 그래서 남편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미국에 도착한 후 그녀는 이 사람이 무대에 서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조항조 씨에게 무대로 돌아가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조항조 씨는 한국에 있는 친구 유연상 씨의 적극적인 권유로 한국에서 싱글 앨범을 내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그가 락 앨범을 낼 것이라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그의 싱글 앨범은 트로트로 꾸며졌습니다. 트로트가 외로운 타향살이에서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는 트로트 가수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무명 시절은 트로트 가수로 데뷔한 후에도 9년이나 이어졌습니다.

결국, 조항조 씨는 1998년 ‘남자라는 이유로’가 큰 성공을 거둔 후에야 무려 20년간의 무명 생활을 청산하게 됩니다. 조항조 씨가 20년 동안 무명으로 지내면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오래 버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무명 시절 동안에도 엄격한 자기 관리를 유지했고, 현실이 꿈을 포기하게 만든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여기서 꾸준한 자기 관리를 철저히 했던 또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바로 유재석 씨입니다. 유재석 씨는 무명 시절이 기약 없이 길어지자 개그맨의 꿈을 포기하고 호프집에서 일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뒤늦게 찾아온 기회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추격전 촬영 당시 숨이 차오르자 금연을 결심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조항조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무대에서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운동했을 뿐만 아니라, 술과 담배 등 몸에 해로운 것들을 모두 끊었다고 합니다. 혹시 좋지 않은 습관을 다시 시작할까 봐 친구들과의 만남도 피했다고 합니다. 조항조 씨와 유재석 씨를 보며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온다. 그리고 준비된 사람만이 그것이 정말 소중한 기회임을 알아본다”라는 인생의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조항조 씨의 성공에 자기 관리가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성공의 일등 공신은 바로 아내 홍숙재 씨입니다. 그녀는 음악을 포기한 남편을 무대로 돌려보냈고, 무명 시절의 조항조 씨를 묵묵히 내조했습니다. 남편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 “저 사람이 내 남편이에요. 제가 이렇게 열심히 내조했어요”라고 자랑하고 싶을 법도 한데, 홍숙재 씨는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가수고 연예인이지, 내가 그런 것은 아니에요”라며 자신의 평범한 삶에 만족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홍숙재 씨의 가족을 제외하면 그녀의 남편이 가수 조항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녀는 허영심 없이 소박한 성품의 인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홍숙재 씨의 생각은 의외의 부작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조항조 이혼”, “조항조 재혼”이라는 뜬소문뿐만 아니라, 홍숙재 씨가 조항조 씨의 내연녀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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