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심수봉 아무도 몰랐던 고통.. 극단선택까지 했던 처참한 인생

은관문화 훈장을 수여받은 이미자를 계승할 국민여가수로 꼽는다면 심수봉이 맨 앞에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978년 대학가요제에서 피아노를 치며 청산가부 넋두리조의 특유한 콧소리로 그때 사람을 부른 그녀를 보고 사람들은 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늦게 대학에 입학한 심수봉은 이미 미 팔 군 무대를 비롯한 여러 밤 무대에서 밴드 활동을 하던 프로였습니다.

그해인 1979년 노래의 데이트와 함께 참가한 10.26 현장에서 일어난 일로 심수봉은 운명의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트라우마가 남아 연인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아이들을 알아주지 못하는 아버지로 낙인을 찍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생각하지 못했던 비극이 습격했습니다.

불면증과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심수봉의 눈물로 얼룩진 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974년에 유경수 여사가 돌아가시고 1979년에 박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전 심수봉은 여러 번 유교사를 꿈꾸었습니다.

꿈속의 육여사는 애타게 마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심수봉은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꿈속 육여사는 나타날 때마다 걱정에 지친 모습으로 변해갔다고 합니다. 이러한 꿈을 여러 차례 꾼 뒤 심수봉은 노래를 부르러 청와대에 갔고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국 가요계에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고 있는 심수봉은 현재는 상상하기 힘든 어려운 일들을 겪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승승장구한 심수봉은 최근 인터뷰에서 자신의 과거를 밝히며 정신병원에 수감당한 경험에 대해 고백했습니다. 심수봉의 과거 이야기는 이미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심수봉은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현장에 있었던 이유로 한동안 가수 활동을 중단하고 어려운 조사와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습니다. 당시 심수봉이 조사를 받던 과정에서는 서울 한남동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가 한 달간 감금을 당했습니다.

그곳에서는 수면제로 보이는 독한 주사도 맞았다고 합니다. 심수봉에 대한 비엄사의 조사가 시작되자 식령학자까지 이를 판단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당시의 조사 분위기는 마치 심수봉을 십령의 신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상황을 언급하며 심수봉과 함께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설명했습니다.

심수봉은 아직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하며 사건 이후 자신을 아끼던 사람이 어딘가로 끌려가서 고문을 받았고 소리를 옆방에서 들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한 달 가까이 정신병원에서 감금된 후에도 심수봉은 자신이 정상인임을 주장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를 가두고 약물주사를 했다고 고백해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렇게 무서운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수봉예 가정은 징조부 시절부터 음악을 전통적으로 해온 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큰아버지와 고모 등도 모두 음악을 했을 정도로 그 집안은 음악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심수봉도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심수봉은 태어난 직후 아버지의 사망으로 아버지와 이별한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결과 심수봉에겐 이보 남동생과 이북 여동생이 각각 하나씩 생겼다고 합니다. 당시 심수봉은 재즈를 전공하였으며, 미 팔 군의 로큰롤 밴 듯 논스톱의 드러머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같은 부대에서 활동하던 김수희와 친분을 쌓았습니다. 심수봉이 트로트 가수로 널리 알려진 반면, 원래는 재즈를 전공한 음악가로서 미 팔 군의 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알면 심수봉의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수봉은 흔히 드럼을 치는 여성 보컬리스트로 카펜터즈의 캐런타팬터와 함께 언급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서산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어머니가 채운 후에는 파경을 맞이하여 어머니를 따라 이 학년 때 서울로 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심수봉은 영등포에 위치한 여중으로 입학했지만, 건강 상해 이후로 이 년간 휴학하게 되었고 인천으로 이사한 뒤늦게 학교에 다시 입학하여 1974년에 고교를 졸업했습니다. 심수봉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이 탁월하여 여러 악기에 능통했으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노래를 부르며 일을 했다고 합니다.

고교 시절부터 이미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1975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연회에서 심수봉을 불러서 노래를 시켰다고 합니다. 그 연애 당시 최고의 가수 나훈아와 함께했던 심수봉은 자리에서 나훈아의 노래를 멋지게 부르며 주목받았습니다. 나훈아는 심수봉의 노래 실력에 감탄하여 앨범 작업을 제안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듬해에는 신세계 레코드와 계약하여 음반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음반 작업은 중단되었고 대학 교육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진 심수봉은 동일한 해에 급작스럽게 대입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숙명여자대학교 작곡과에 지원했지만, 불합격하고 이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심수봉의 본명은 신민경이었지만 가수로서 성공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권위로 인해 어릴 때 스님이 지어준 법명인 심수봉으로 예명을 정했다고 합니다.

1978년 심수봉은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었을 때 MBC 대학가요제의 대학생 자격으로 참여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가요제 참가자들은 포크나 그룹사운드와 같은 음악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였지만 심수봉은 자신의 주전공인 재즈가 아닌 트로트로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대학가요제에는 배철수 노사연 임배천 등 다양하고 강력한 참가자들이 있었고, 속에서 경쟁을 펼쳤습니다. 결과적으로 심수봉은 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 대회에서 부른 노래를 통해 그녀는 기타를 치며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심수봉은 8도에서 인기 연예인으로 부상하게 되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도 그녀를 좋아해 공정동 안과에 서 있었던 술자리에 심수봉을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날 이후 심수봉은 다양한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심수봉은 모델 신재순과 함께 공정동 안가에서 열린 닥정희의 술자리에 초대되었습니다. 이날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의 술자리로 여겨졌지만 김재규가 차지철과 박정희를 총살하면서 엄청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을 중심으로 한 합동수사본부가 박정희 암살 사건을 강도 높게 조사하면서 심수봉 또한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심수봉은 현장에 있던 것일 뿐이었기 풀려났지만 이후에는 방송활동이 금지되고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심수봉은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 옛 주연으로 캐스팅되었고 영화 주제곡 OST도 직접 만들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개봉 후 관객 5만 명을 돌파하여 흥행에 성공하며 홍콩으로 수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심수봉은 이후에도 여전히 가수로서 활동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1979년에는 드라마 순자의 가을 OST를 직접 만들어 부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곡의 문제가 없었지만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노래 제목에 등장하는 영부인의 이름이 순자인 것이 이유로 방송 금지 조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1983년 후배 가수 방미가 이 노래에 제목을 올가을엔 사랑할 거예요로 변경하고 가사를 일부 수정하여 방송 금지를 피했으며 심수봉은 1984년 방송 금지 조치가 해제된 후 그때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올가을엔 사랑할 거야라는 제목으로 다시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심수봉은 1984년에 가요계에 복구하면서 직접 작사한 한국 남자는 배 여자는 한국라는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이 앨범은 외설 시비에도 불구하고, 2만여 장이나 팔려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1985년 발표한 무궁화라는 곡은 히트하였지만 가사가 시대적 상황에 국민을 선동하는 뜻이 있다고 여겨져 방송 하루 만에 금지 조치를 받기도 했습니다. 심수봉은 정치적 탄압에 시달려 왔지만 음악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여 꾸준한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1987반면, 사랑밖에 난 몰라 노 주목받아 음반과 콘서트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2011년 음악 활동 종료 후 2018년 내 삶은 빛나기 시작했다. 앨범을 발표했습니다. 엄마 사랑해요. 는 발표 직후 친모의 별세와 연결되어 감정적인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의 인생은 정신적 충격과 복잡한 가족사를 겪으며 변화해 왔습니다. 이후 1995년 심수봉은 김흥국의 소개로 남편 김우경과 만나 재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라디오 PD로 처음 만난 때 심수봉을 섭외하기 위해 노력하며 두 사람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재혼 시 아이들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속적인 노력 끝에 가정은 행복을 찾아가고 심수봉은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를 대중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겨내고 행복한 삶을 살며 심수봉은 훌을 털어내며 대중과 공감을 나누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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