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전남 완도에서 발생한 일가족 실종 사건으로 세 가족이 앞바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수면제 검색 등 극단적 선택을 준비한 행동이 확인되어 사고사가 아닌 함께 마지막을 향해 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안쓰러운 일이지만 함께 마지막을 선택하는 것은 더 큰 무게를 지닙니다. 이렇게 남겨진 사람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슬픔에 휩싸여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선택을 함께 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지난 2020년 박지선 모녀 2010년 행복전도사 최윤혜 부부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행복을 전하려고 노력했지만, 안타까운 슬픔을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오늘은 최윤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2010년 10월에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소식의 주인공은 행복전도 교사이자 작가인 최윤희였습니다.
최윤희는 남편 김 모 씨와 함께 일산동구 창항동의 한 모텔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모텔 종업원이 오전에 투숙한 부부가 나오지 않아 의심하여 경찰에 신고하면서 사건이 드러났습니다. 최윤희와 남편은 모텔에서 각각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최윤희는 모텔 침대에 누워 있었고, 남편은 화장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테이블 위에서 최윤희가 직접 쓴 편지지 한 장 분량의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최윤희의 유서에는 이 년 동안의 이번 퇴원이 많은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더는 현재의 고통을 이겨내기 힘들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동안 폐와 심장질환으로 인해 재활이 어려운 정도의 고통을 겪고 있었던 최윤희는 추석 전주에 폐에 물이 찼다는 판정을 받았고 최근에는 심장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합니다. 그녀는 자가면역질환 중 하나인 루프 습병을 앓았습니다.
최윤희는 이 년 동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심각한 고통을 겪었고 유서에서는 물리적인 고통을 견디는 것이 힘들어 더이상 입원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는 괴로움을 토로했습니다. 최윤희는 유서에서 혼자 해남 땅끝 마을로 가서 수면제를 복용하려 했으나, 남편이 119에 신고하고 찾아왔다고 밝혔 병으로 인한 통증이 지나치게 심해 견딜 수 없었고 남편은 그녀가 일상에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를 알기에 말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최윤희가 혼자 떠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함께 떠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 유서에 담겨 있었습니다. 최윤희는 마지막으로, 호텔에는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 또 용서를 구합니다. 너무 착한 남편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입니다. 그동안 저를 신뢰해주고 사랑해 해주신 많은 분들께 죄송하다며 마무리했습니다.
최윤희는 살아있는 동안 항상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으며 특히 강연과 강의를 통해 사람들에게 행복과 희망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한 뒤 행복과 관련된 강의로 많은 인기를 얻어 스타 강사로서 활동했습니다. KBS의 명사특강 SBS의 행복특강 등 다수의 TV 강의를 진행하고 KBS 아침마당과 같은 프로그램의 판넬로 출연하여 인지도를 높였습니다.
또한 최윤희는 행복과 관련된 주제로 20여 권의 저서를 출판하며 그녀만의 철학을 전했습니다. 그녀는 행복은 삶의 필수품이라며 마음의 상태에 따라 불행도 행복으로 바뀔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나는 언제나 행복해라는 최면을 걸고 삶에 대한 열정과 용기를 품고 있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생전의 행복한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최윤희의 마지막 선택은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2000년대 그 시기에는 자신의 처지에 비관적인 태도를 취한 많은 연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며 그중 일부는 신드롬으로 불리울 정도로 일반인들에게도 강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윤희는 다양한 말과 문장을 통해 생생한 경험을 전달하며 삶을 마감하는 이들에게 통렬한 비판과 따뜻한 위로를 제공했습니다. 최윤희는 자신이 두려움에 똘똘 뭉친 콤플렉스 덩어리에다 매일매일 죽고 싶다는 비관적인 생각에 시달리던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희망을 품고 결국에는 행복전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메시지 전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로 그녀 자신이 희망을 강조하며 남들에게 전하던 삶을 마감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혼란과 슬픔을 안겼습니다.
남들에게는 행복을 전하던 그녀가 자신은 행복하지 못했다는 모순에 많은 이가 아이러니를 느꼈습니다. 그녀의 극단적인 선택은 아이러니의 찬참으로 충격적이었고 많은 이들은 믿기 힘들다며 슬픔과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최윤희는 예전에 자주 말하곤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은 이효리나 이영애가 아니라 웃는 사람이다. 웃음에는 항암 효과가 있어 크게 웃으면 보양십첩의 효과가 있다며 사소한 일에도 즐거워하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뒤에는 그녀의 행복하지 않은 시절이 숨어 있었습니다. 최윤희가 행복에 대해 강조했던 것은 사실은 어려운 가정환경을 경험한 결과였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녀가 명문대를 나와 밝게 웃고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녀는 실제로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학생으로 대학 시절에는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하며 학비를 벌어왔습니다. 힘든 환경 때문에 그녀는 대학 시절 내내 위축되어 있었으며 우울함을 자주 느끼곤 했습니다. 대학 시절의 어려움을 겪은 후 최윤희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선택했습니다.
이 결혼으로 더 나은 삶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또 다른 어려움을 안겼습니다. 결혼을 통해 마련한 열 평짜리 집도 있었지만 남편은 사업을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엇바뀌었습니다. 열심히 살아가며 마련한 작은 집도 남편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무산되었습니다. 일거리와 자금이 모두 망가지면서 최윤희와 가족들은 순식간에 거짓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던 최윤희는 자신과 가족에게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스스로에게 문제를 던졌습니다. 최윤희의 주관식은 가혹할 테니 객관식으로 내줄게 라며 제시한 선택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일 이혼을 가족 동반으로 목숨을 끊어 삼 묻지마 타락사 새 출발 몇 번 이후는 복잡한 절차와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좁았습니다. 가족 동반으로 목숨을 끊는 것은 자신의 아이들을 보며 그런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습니다. 묻지마 타락은 자신의 얼굴을 헤아려야 했고 이와 같은 이유로 최윤희는 마침내 4번 새로운 시작을 택했습니다. 새 출발의 선택은 그녀의 삶에 마법 같은 일들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상황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최윤희의 마음가짐은 180도 달라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결심을 한 후 그녀는 신문을 뒤적이다가 주부 사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발견하고 취업 기회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카피라이터가 무엇인지를 몰라도 부딪쳐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시험을 보러 간 최윤희는 단순하게 아무것도 모르기의 반말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여 제출했습니다. 이 독특한 방식이 결과적으로 1331명을 제쳐놓고 단독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사회생활이 어려웠지만 주눅들지 않고 끝까지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최윤희는 현대방송홍보국장 서울특별시 영상매체의 심해위원 여성단체협의회 출판공부위원 등 높은 직책을 역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어려운 출발에서 시작하여 그녀는 뛰어난 업적을 이루어냈습니다. 긍정의 힘으로 어려운 시절을 극복한 최유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행복과 긍정에 대한 세계를 설파해 왔습니다.
그녀의 행복 강의는 여러 기업 공무원 대학원 최고 경영자 과정 시민 주부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고 이를 토대로 스탄 러브콜을 받아 방송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강의와 방송을 통해 긍정의 힘을 전하는 모습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녀의 역설적인 선택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행복전도사 최윤희는 긍정의 메시지를 전하며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우울증과 신체적 통증으로 고통받았고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전문가들은 행복전도사 타이틀이 자신에게 압박을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최윤희의 남편도 우울증을 앓았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노인들이 우울증을 많이 앓는 이유 중에는 신체적 통증도 있습니다.
최윤희가 항상 긍정적인 이미지를 유지하며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결정은 예상박이었습니다. 최윤희의 힘든 시절을 추억하며 그녀가 평온한 곳에서 행복하게 쉬고 있다면 좋겠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