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승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대략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워낙 곡절 많은 삶이었던지라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왔던 김주승 사망 소식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다시금 회자되는 그의 살아생전은 여전히 누리꾼들의 가슴을 자라게 한다. 대한민국의 역사에 남은 희대의 경제 사범이자 사기꾼이 있습니다.
바로 장영자인데요. 장영자는 큰손이라고 불리며 남편과 거액의 어음사기 행각을 버려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놨습니다. 장영자 사건은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요. 그렇게 큰 사건을 일으켰던 주인공이기에 장영자에게 고통받은 피해자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근데 유독 그녀 때문에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편하게 눈을 감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장영자의 사위라는 꼬리표로 평생을 고통받았던 배우 김주승인데요.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김주승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주승은 1983년 MBC 공채 십 읽기 탤런트로 데뷔했습니다.
수려한 외모와 안정적인 연기력을 인정받으면서 8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매김 했었죠. 왕성한 활동을 하던 김주승은 90년에는 큰 손 장영자의 사위가 되며 크게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요.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때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장영자는 전두환 정권 당시 권력자들과의 관계를 이용해 7000억 원대 어음 사기를 저지를 희대의 사기극을 벌입니다.
당시 장영자의 범행으로 잘 나가던 여러 기업은 부도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장영자의 계속된 사기 행각에 꾸준히 고통받는 피해자가 있었는데요. 바로 장영자의 사위 김주승이었습니다. 당시 김주승은 잘 나가는 사업가로 이름을 알렸는데 장영자 사건과 엮이며 사업 부도를 맞았습니다. 이후 40 여 억의 거액 사기 혐의로 수백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결국 잘 운영하던 사업체와 배우로 사는 삶을 포기하고 도피하듯 이민길에 오릅니다. 그 과정에서 김주승은 많이 힘들었다고 하는데요. 자존심 큰 상처를 입은 나머지 술과 담배에 치들어 살며 몸을 합대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심하게 겪었다는데요. 한국에서 아내가 번역일을 해서 붙여주는 돈으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김주승은 서울에서 뒤지닥꺼리하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며 다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1996년 귀국 후 금주 금연을 하며 피 끓는 노력 끝에 SBS 드라마 형제의 강으로 복구하게 됩니다. 이때 김주승에게 다시 한 번 시련이 찾아오게 됩니다. 형제의 강 촬영 도중 신장암 판정을 받게 된 것인데요. 심장은 온몸의 혈액순환을 관장하는 장기로 암이 생기면 전이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 합니다. 의사도 그의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하루 빨리 수술하자 만류했지만, 김주승은 그럴 수 없었다고 합니다.
형제의 가는 그가 어두운 시간을 지나 다시 빛을 보게 해 준 작품으로 김주승에게도 무척이나 의미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는 결국 목숨을 담보로 온 힘을 다해 연기했고 작품을 끝내고 나서야 수술대에 올랐다고 합니다. 2002년 김주승은 병세가 호전되어 다시 연예계에 복귀해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김주승은 이후 드라마 제작자로도 변신했는데요.
김주승은 연기자 방송국 시청자들까지 모두가 만족하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또 한 사람 냄새나는 따뜻한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 했죠. 김주승은 평소 연기지 처우개선에 관한 관심도 컸다는데요. 하인터뷰에서 김주승은 그의 뜻에 대해 이렇게 밝혔습니다. 나이가 들어 소외되어 가는 연기자 부당한 대우를 받는 연기자들을 보며 제작 환경을 개설하고 싶었어요.
그런 소수 권익을 보호해 주면서 드라마를 잘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김주승은 그가 제작한 나도야 간다에서 40살 넘어 딸과 같은 학번으로 대학에 다니는 엄마를 주인공으로 세 자매가 펼치는 따뜻한 가족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청춘 남녀 일색인 당시 드라마와는 달리 참 따뜻한 가족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김주승은 1996년 부도로 인한 수배로 미국으로 도피했을 당시도 회상했습니다. 그는 사업 실패로 자존심 큰 상처를 입은 나머지 술과 담배에 치들어 살며 몸을 학대했다고 합니다. 하나쯤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 같아요. 아마 혼자였으면 견뎌내기 힘들었을 겁니다라고 고백한 김주승은 아내에 대한 고마움도 드러냈습니다.
96년 당시 김주승은 도망치듯 떠나야만 했던 퍼라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미국행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랬던 나머지 경제적인 어려움도 심하게 겪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아내가 번역일을 해서 붙여주는 돈으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재기를 생각하게 됐다.
여러 차례 이혼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그건 우리 부부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얘기 나며 그간 돌았던 이혼설의 대해서도 일축했습니다. 김주승는 서울에서 뒷바라지하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며 다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안물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또한 부와 명예를 잃었으니 건강이라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술 담배부터 끊었다고 합니다.
제작자로서의 꿈을 이뤘다는 기쁨도 잠시 그는 다시 한 번 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이번에는 췌장암입니다. 두 번째 암으로 큰 고통에 휩싸인 김주승은 주변과 연락을 모두 끊고 투경 생활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힘든 시절 그를 지지해줬던 아내까지 잃게 됩니다. 김주수는 2007년 1월 17년 만에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었는데요. 당사자가 아닌 만큼 정확한 이혼 사유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연이은 사업 실패와 투경 생활로 힘들어진 환경 탓이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당시 두 사람의 이혼을 두고 건강에 이산이 생긴 김주승이 가족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 집을 나와 잠적을 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밝히기 힘든 사적인 이유로 남편이 집을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요즘 여러 가지로 복잡해 혼자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고 말한 부인 김 씨의 인터뷰가 근거로 언급 되기도 했죠.
잇따는 사업 실패와 사기꾼 장모라는 꼬리표 때문에 김주승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다는데요. 결국 김주승은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2007년 8월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생전 시끄러운 삶 속에서 많이 고통받았던 위기에 가는 길은 조용히 가고 싶어서였을까요? 김주승은 신문의 부고도 내지 않은 채 일체의 조문까지 받지 않고 쓸쓸히 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날이 돼서야 뒤늦게 소식을 듣고 하이라 김정현 정보석 등 평소 고인과 가까이 지내던 동료들이 그를 찾았는데요. 조문을 받지 않겠다는 유족 측의 간곡한 뜻에 따라 가는 길을 배웅조차 못했다고 합니다. 김주승는 마지막 가는 길 조용히 세상을 마감하기를 원했다는데요.
유족이 말한 바로는 조문을 받지 말 것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긴 채 홀로 쓸쓸히 떠났다고 함 고인의 유언대로 조문객을 받지 않았던 그의 빈손은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의 마지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쓸쓸했습니다. 착하고 겸손한 연기자였으며 소외된 배우들의 권익을 찾아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마지막이 더 슬프네요. 하늘에서는 생전받은 고통 다 있고 편안해지길 바라며 삼과 고인의 명복을 빔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