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MBC 드라마 대장금은 당시 최고의 인기 작품 중 하나였으며, 특히 주인공들의 스승으로 나온 중년 배우들의 활약이 돋보였습니다. 극 중 배우 여운계는 한백영의 스승으로 연차가 어린 최 성금이 최고 상궁에 자리에 오를 수가 없게 되자, 허수아비로 최고상궁 자리에 오르며 캐릭터입니다.
최고상궁에 오르기 전에 장고 상궁으로 궁에서 된장, 고추장 등 장류를 관리하는 직책이었지만, 음식 실력만큼은 극 중에서 장금 못지않은 최고 실력자이기도 합니다. 당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기도 하였습니다. 대장금 이외에도 여운계는 많은 작품에서 활약하며 연기 열정이 가득한 배우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투병 중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폐암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크게 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뒤늦게 밝혀진 사인과 연기에 대한 열정, 인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배우 여운계는 무학여자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당시로서는 굉장한 고학력이었습니다. 전국에 대학생이 10만여 명에 불과한, 200명에 단 1명도 안 되던 때였기 때문이다. 특히 여대생은 훨씬 더 드물던 시절이고, 특히 연예계에는 대졸자가 남자도 몇 명 안 될 정도로 흔치 않았고, 고졸도 고학력 취급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여운계와 비슷하거나 더 윗 연배에서 명문 대학을 다닌 여배우들이라곤 김혜자, 박정자, 손숙 정도가 있습니다.
1962년에 실험극단 단원으로 지내다가 KBS 공채 탤런트에 합격한 뒤, 1964년 TBC의 공채 탤런트에 다시 합격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일일 연속극 눈이 나리는데의 시골 다방 마담 역할로 안방극장에 데뷔했습니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24세 때부터 벌써 할머니 역할을 맡았다고 합니다. 1970년 TBC 연기대상에서 여러 배우들과 함께 초대 대상을 수상했고, 1974년 백상예술대상에서는 처음으로 신설된 TV 부문 여자 최우수 연기상을 단독으로 수상하였습니다.
이후 여러 역할을 맡아 활약하였으며 동시에 길은정이 직장암 투병으로 하차한 EBS의 어린이 프로 만들어 볼까요에서 요요 할머니로 출연하기도 하였습니다. 1998년 드라마 왕과 비에서 폐비 윤 씨의 모친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고 1999년 김수현 작가의 작품 청춘의 덫에서도 할머니 역을 맡아 극의 중심을 잘 잡았습니다.
그리고 2003년 드라마 대장금에서 주인공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부정한 권력에 맞서다 퇴장하는 ‘정 상궁’ 역으로 좋은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대장금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일본 도쿄에서 팬미팅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2005년 영화 ‘마파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 연이어 출연하였고 세 작품 모두 종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현재 20-30대 청년들에게도 ‘여운계’ 이름 석자를 각인시키게 되었습니다.
2007년 SBS 드라마 왕과 나의 4회분까지 촬영을 마친 여운계는 중도 하차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때 캐릭터가 배우 김수미로 교체되어 혼란을 겪은 시청자들의 반응이 갈렸던 것입니다. 여운계가 돌연 중도 하차하게 된 이유는 바로 건강이 악화하여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신장염으로 인해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여운계는 한 방송에서 당시를 말하길 “사실, 신장염이 아니라, 신장암 투병 중이에요”라고 밝히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여운계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는 벌써 신장암 증세가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여운계는 입원을 거부하며 신장염이라고 전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의 가족들 역시도 신장암 사실을 몰랐다고 해 놀라움을 자아냈습니다.
수술 직전에서 가족에게 사실을 알리고 이후 성공적으로 수술하게 됩니다. 암으로 투병하며 건강이 나빠졌던 시기에도 여운계는 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것으로 전했습니다. 남편이 여운계의 건강을 위해 제주도에 살게 했지만, 그는 서울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투병 생활을 하다가 3달 후 재기한 다음 드라마 ‘며느리 전성시대’에 출연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장화홍련에 출연하던 중 건강 악화로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2009년 폐렴에 걸렸다는 보도와 함께 장화홍련 촬영 도중 중도 하차했는데, 이와 함께 신장암이 폐로 전이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다가, 2009년 5월 22일에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원주, 나문희, 선우용녀, 사미자, 엄앵란과 친한 관계였으며, 전원주, 사미자와는 본인들의 성 씨를 따서 여전사 모임이라 칭하기도 했습니다. 나문희는 장례식 내내 빈소를 지키고 영결식까지 참여할 정도로 우애가 깊었습니다. 당시 견미리와 거의 모녀지간이나 다름없이 지냈으며, 실제로 견미리가 사석에서 여운계를 엄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후 여운계 딸 차가현 씨가 어머니를 회상하며 눈물 흘리며 고백하길, “먼저 알았더라면 이렇게 사무치지는 않을 것 같네요”라고 하였습니다. KBS 2TV ‘여유만만’에 출연하며 당시 여운계 씨의 딸 차 화현 씨는 “어머니의 병을 지인을 통해 알게 됐다. “딸로서 미리 알지 못했던 사실이 아직도 죄송스럽다.”라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려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차 화현 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서너 번 정도 꿈을 꿨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은 바닥은 빨간 카펫으로 깔려있고 벽은 모두 황금인 아주 좋은 집이 있었는데, 그게 우리 집이었다.”라며 “문을 열어보니 어머니가 계셨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당시 내가 너무 힘든 상황이었는데 꿈속에서 어머니를 보고 펑펑 울면서도 굉장히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가 웃으며 나에게 ‘잘가’라고 말하고 가셨다. 그 꿈을 꾸고 나서 왠지 모르게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늘이 내려준 선물 같다.”라고 전해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차 씨는 “다 나으신 줄 알았는데 또 암이라니 너무 기가 막혔어요. 병원에서 ‘사이버나이프’라고 하는 방사선 치료로 암 덩어리를 줄이면 생활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 거라고 했어요. 다만, 당장은 어렵고 치료해서 어느 정도 상태가 호전된 뒤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제주도에서 요양하시는 동안 상태가 많이 좋아졌는데, 수술 날짜가 잡힌 상태에서 덜컥 감기에 걸리셨어요.
컨디션이 좋아지니까 방심하고 다시 연기 활동을 시작하신 게 원인이었죠. 당시 꽃샘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는데, 아침드라마 ‘장화홍련’에 출연하느라, 새벽에 강화도를 왔다 갔다 하면서 무리하신 모양이에요. 그게 폐렴으로 번졌고 손쓸 새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뜨셨어요.”라고 전했습니다. 뜨거운 열정을 보였던 배우인 故 여운계 씨를 많은 이들이 이토록 잊지 않고 그리워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