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계의 전설 나훈아 유명해서일까요? 나훈아에게는 잊지 못할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괴한이 등장해 나훈아를 습격해 병원으로 이송된 일화가 있었습니다.
또한 남진과의 불화설 외도설과 재벌과의 일화 수십억의 재산 이혼 사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죠. 또한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자식에게 한 일이 밝혀졌습니다.
오늘은 나훈아를 죽을 만큼 힘들게 한 일들과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나훈아는 한국 재계 서열 1위 삼성이건희의 부름을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삼성그룹의 전 고문 변호사였던 저자 김용철이 내부고발 형식으로 쓴 책에서 엉뚱한 인물이 회자됐습니다.
바로 슈퍼스타 나훈아의 일화가 언급된 것인데요. 이건희 회장 일가의 파티에 초청되는 가수는 보통 이에서 세 곡을 부르고 3000만 원의 행사비를 받았는데 유독 나훈아만 아무리 많은 돈을 주겠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죠.
나훈아는 삼성측 부름을 거절하며 나는 대중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4대중 앞에서만 공연하겠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 표를 끊으라고 말했죠. 현대의 정주영 부인 변종성 여사 칠순 행사 때 섭외한 가수가 하추나와 나훈아 두 사람이었는데. 당시 나훈아는 개인 행사에 노래를 하러 갈 수는 없다고 거절을 하여 대신 초대받아 노래를 했던 분이 직접 말한 일화도 있습니다.
그 외에 북한 단독 공연을 요청받고 북한 측의 간섭이 싫어 거절하고 후에 북한 공연 때도 국내 공연 스케줄 이후로 가지 않았습니다. 국회의원직 제의도 있었지만 거절했습니다. 제일 잘하는 노래를 하겠다는 이유였습니다.
고향인 부산시 자치단체에서 나훈아 기념관을 만들어 준다는 했는데 내가 살아가면서 잘못할 경우에는 어찌하겠느냐며 사양했습니다. 가수로서 무대에 대한 높은 금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나훈아의 나이는 1947년생으로 공식적으로 기재돼 있습니다. 하지만 1951년생이 맞을 것이라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동창들 친구들이 모두 1947년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훈아의 나이는 왜 다르게 알려진 것일까요?
추측하기에는 당대 최고 라이벌이었던 남진이 1946년생이기 때문에 나훈아가 1951년생보다는 1947년생으로 비교되는 것이 더욱 나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배적입니다. 고향이 부산이기 때문에 평소 인터뷰를 보면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라이벌이었던 남진의 고향이 전라남도 목포이기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대결 구도가 있었는데요.
남진은 전라도 사투리를 나훈하는 경상도 사투리를 써서 매우 대조적었습니다. 부산에 얽힌 루머도 있었습니다. 비메스와 스캔들로 인해 일본 야쿠자들에게 보복을 당했다는 루머입니다. 당시 나훈아가 부산에 있었는데, 급하게 부산 병원으로 이송됐고 신체에 중요한 부분이 손상을 당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고 나훈아가 직접 기자회견을 통해 바지 퍼포먼스를 벌이기까지 했고 상담자 면모를 보였습니다. 나훈아는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 경력이 있습니다. 첫 번째 아내는 배우 고은아의 사촌인 이숙희입니다. 첫 번째 아내 이스키와 이때 전 결혼해서 군 복무 중에 이혼했습니다.
1973년 결혼했고 3년 후 1976년에 이혼했죠. 당시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여배우 김지미와 결혼 소식을 알렸죠 김지미는 톱스타로 나훈아보다 7살 많은 나이였습니다. 당시 언론은 두 사람이 1971년부터 연인 관계였고 연애 중에 이숙희와 결혼을 했다고 기사를 했습니다.
이에 김지미가 말하길 원래 사기는 사이 아니었고 같이 다니는 사이일 뿐이었으나 언론의 오해로 교제 중이라고 보도가 나고 이에 김지미는 오기가 생겨 정말로 교제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결혼 소식의 여론은 두 사람을 비난했습니다. 나훈아는 두 번째 결혼이었고 김지민은 세 번째 결혼이었죠.
두 사람은 6년 만에 헤어졌고 나훈아는 헤어진 이유에 대해 심하게 부부싸움을 했는데 후로 냉전이 없고 집사람이 이혼을 제의했다고 말했습니다. 여자는 돈이 없으면 살 수가 없을 것이라며 모든 재산을 김지미에게 위자료로 준 일화는 유명합니다.
후에 밝혀지기를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관계였으며 전 재산을 넘겨줬기에 파경의 사유가 나훈아에게 있지 않았느냐라는 설도 있었죠. 2013년 김지민은 나훈아를 만난 것은 잘못인 것 같다며 나훈아와의 동거를 후회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시하게 되는데 원인은 자신의 동거에 마음에 상처 입은 딸로 인한 말 못할 아픔이라 말했습니다.
나훈아는 김지미와 헤어진 1년 후 또 결혼 소식을 전합니다. 14살 연하 후배 가수 정수경이 혼전 임신을 했고 1985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일 남 일 녀를 낳았고 1993년 정수경이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 보스턴으로 떠났습니다.
2011년 정수경은 나훈아를 상대로 이혼 재산분할 소송을 냅니다. 첫 선고 공판의 나우나 참석하지 않았고. 정수경은 변호사와 함께 모습을 보였습니다. 정수경은 나훈아가 갑자기 연락을 끊고 3년간 자녀 부양비와 생활비를 주지 않았으며 불륜을 저질렀다고 이혼 소송을 합니다. 이에 나훈아는 통장 거래 내역을 확인해 보면 될 것이라고 반박했죠.
그리고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의 주장이 첨예하게 부딪쳤고 재판부는 나훈아의 부정행위와 자녀 부양을 안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했습니다. 후로 3년 후 정수경은 또 다시 이혼 소송을 합니다.
대법원 판결 이후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훈아 측과 연락이 되지 않고 나훈아가 나와 정상적인 혼인 관계를 유지할 의지가 없어 보여서 다시 소송을 한다고 말합니다. 정수경이 말하길 아들이 암투병 중인데 그런 와중에 아빠한테 연락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너무 비참했다고 말하며 최근 협의 이혼을 하려고 했는데, 나훈아가 이미 너에게 1000억 원에 이르는 돈을 주지 않았냐라며 재산 분할을 거부했고 정수 수경은 만약 내가 1000억 원을 받았다면 지금 이러고 있겠냐며 반박했습니다.
그 후 재산분할은 매달 5000만 원의 저작권료에 대한 분할을 요구했죠. 나훈아는 결국 12억 1000만 원을 위자료로 지급하고 정수경과 이혼하라는 판결을 받습니다. 2007년에는 나훈아의 아들이 결혼했는데 나훈아는 불참했습니다. 전 아내와 만남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결혼할 때 신혼집으로 아파트를 사줬다고 전해집니다. 나훈아에게는 딸도 있는데, 경제적인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두 자식들 모두 나훈아의 도움 덕분에 풍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다만 어버이날이나 생일 같은 날은 가족과 함께해야 하지만 나훈아는 일절 자식들과 왕래가 없었다고 합니다.
현재 손주들이 있는 상황이지만 아이들 역시 나훈아와 1절 왕래가 없습니다. 나훈아가 따로 만나자는 요청은 안 한다고 전해집니다. 이 역시 전 아내와 엮이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닌가라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훈아의 재산은 어느 정도일까요?
세 번째 부인 정수경이 분할 요구한 나훈아의 부동산은 두 개입니다. 용산구 한남동에 69 평 주상복합과 경기도 양평군 300 평 토지와 120 평 건물로 43억 원입니다. 다만 대출이 22억 원 수준으로 실재산은 약 21억 원으로 추정되었죠. 당시 부동산 전문가는 톱스타치고는 부동산을 굉장히 적게 보유하고 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2023년 한남동 집값이 폭등했고 UN빌리지 고급 빌라로 2021년 해당 평수의 마지막 거래가 42억이라 부동산으로도 굉장히 많은 수익을 거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송 관계자는 나훈아는 저작권 수익만 약 420억 원 수준이라고 전했는데요.
연 저작권료만 약 6억 원이며 음원 저작권이 사후 70년까지 지속되는 걸 고려하면 총 수익은 약 420억 원으로 추정됩니다. 나훈아는 스페셜 방송에서 마이바흐를 타고 다녀 눈길을 끌었습니다. 벤츠마이바흐 가격은 2억 4000만 원대에 형성되어 있는데요.
매년 진행된 나훈아의 콘서트에 해당 수익이 3억에서 5억 원임을 감안하면 차는 검소해 보일 정도라고 하죠. 가수 나훈아가 깨진 병에 피습된 사건이 최근 재조명됐습니다. 사건은 1973년 6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발생했는데 나훈아는 쇼를 마치고 세 번째 앙코르곡 찻집의 고독을 부르는 도중 무대에 난입한 남성A가 휘두른 사이다 병에 맞아 병원에 이송됐습니다.
그는 사고로 왼쪽 얼굴에 큰 상처를 입어 70바늘이나 꿰매는 대수술을 받았습니다. 당시 일부 언론은 피습 사건의 배후로 가수 남진을 지목했습니다. 나훈아와 라이벌인 그가 가해자에게 범행을 사죄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 남진은 검찰에 소환했고 5분 만에 풀려났죠. 남진은 검찰에게 증언하길 어느 날 아침 인기척의 눈을 떴는데 머리맡에 모르는 얼굴이 있었고, 귀하니 돈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남진이 거부하자 당신 라이벌을 했지만, 돈을 줄 거냐고 말을 했습니다.
남진은 정상이 아니구나 싶어 귀환에게 우리는 마피아가 아니라 예술인일 뿐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A는 출소 이후에도 남진을 찾아가 돈을 달라는 협박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남진은 A를 협박 등 혐의로 고소했고 A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아 다시 구속됐습니다.
다만 A는 알려진 것과 다르게 남진의 팬이 아니었습니다. 남진이 말하길 몇십 년이 지나서 사실을 알았는데 나훈아를 피습한 귀하는 신성일 선배한테 제일 먼저 갔고 저한테 왔던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후 며칠 있다가 나훈아의 피습 사고가 일어났다고 놀라운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원래 나훈아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나온 신성일을 노렸는데 공연 중 잠이 들어 신성희를 놓쳤고 대신 나훈아를 노린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결국 나훈아와 남진의 오해는 풀리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