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정수라 본명은 정은숙으로 1963년 서울 출생입니다.
1980년대 중반 나미 이선희 등과 함께 여성 트로이카로 불리며 시절을 상징하는 가수와 같았던 정수라 씨 그런 대단한 가수였던 정수라 씨이지만 사실 그녀도 차마 말 못할 남모를 괴로움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재벌 총수의 아들을 낳아 집안 싸움을 하고 가수 김한선 씨야 동서지간이라는 등 듣기만 해도 어이가 없는 이 상황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에게 배신당해 여태껏 쌓아온 모든 것을 잃었다는 그녀 아직까지도 사람이 무섭다고 합니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TBCM 송인 종소리를 부르며 일찍이 가수로 데뷔하게 된 그녀 그 시절에는 주로 광고 음악이나 만화 영화의 주제곡 등을 부르며 얼굴 없는 가수로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가수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성인이 되고, 난 후인 1982년 그런 사람이 나는 좋아를 부르며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유명한 노래 대한민국을 발표하게 되는데요.
여러 스포츠 행사 등에 꼭 빠지지 않았던 이 노래는 당시에는 물론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국민적인 노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노래로 정수라 씨는 일야 스타덤에 오르게 되는데요.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후에도 도시의 거리 난 너에게 환희 등을 히트시키며 이은하를 제치고 10대 가수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해내는가 하면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잠실종합운동장에서 노래를 부르며 한국여자 톱 가수 대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80년대는 그야말로 그녀의 전성기였습니다. 1980년대 한국을 주름잡았던 가수 정수라 1990년이 되자 그녀는 미국으로의 진출을 선언하게 되는데요.
동양인이지만 흑인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던 그녀이기에 미국에서도 충분히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이클 잭슨의 형이었던 저메인 잭슨과 함께 듀엣으로 네 곡의 노래를 발표하는 등 미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었는데요.
미국에서의 활동에 전념하느라 국내에서는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정수라 씨 그녀가 얼굴을 보이지 않자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덧 이상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정수라가 갑자기 안 보이는 이유 정수라가 잠적을 한 이유는 그녀가 재벌 총수의 아들을 몰래 낳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가로 500억 원을 받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회장의 아들을 낳으면 재산을 주려고 했는데, 딸을 낳아서 현재 양쪽 집안이 재산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회장은 바로 정주영 회장 있다. 정수라가 쌍둥이를 낳았다.
정수라는 가수 김완성과 동서지간으로 정주영 회장이 양말 공장을 줬다더라 라는 등 처음 이 소문을 들은 정수라 씨는 설마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무시를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살을 붙여서 점점 더 퍼져나갔는데요.
세월이 흐르고 정수라 씨가 당 씨를 회상하기엔 음반 작업을 위해 미국에 4개월을 가 있었는데, 그동안의 소문이 난 것이다.
작은 소문이 아니었다 내가 아들을 낳으면 5억 원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딸을 낳아서 못 받았다는 등 아파트 한 동을 받았다는 등 동해 쪽에 있는 땅이 모두 내 것이라는 등 서울의 유명 백화점들이 모두 내 것이라는 등 같이 목욕탕을 다니던 현미가 나 때문에 목욕탕에서 싸움도 했다.
정수라가 회장 애를 낳았는데 자기가 거기 돌잔치를 다녀왔다나 뭐라나 소문에 대응을 안 하 아무것도 아니다.
티비에 나가서 얘기하고 월간지 인터뷰에서 얘기했는데 그때뿐인 거다 소문은 멈출 줄 몰랐다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지금에야 인터넷이 발달해서 애초에 이런 황당한 소문들이 퍼질 수가 없지만, 당시에는 이런 일이 흔했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정수라 씨의 이 같은 소문 중 정주영 회장이 사망한 이후에 정수라가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변장한 상태로 몰래 조문을 했다더라 따는 등의 이야기가 퍼져 있을 정도로 둘에 대한 소문이 참 많았는데요.
당연히 모두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가족장으로 치러진 고 정주영 회장의 장례식 조문객만 33만 명이 다녀갔을 정도로 엄청난 인파와 기자들이 몰려들었는데요.
하지만 소문만 무성할 뿐 정작 교문으로 왔다는 정수라 씨를 찍은 사진은 한 장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992년 국민당의 후보로서 정주영 회장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정작 정수라 씨는 오히려 반대편 후보였던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의 유스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정주영이 아닌 김영삼 후보의 유세 지원 활동을 하였습니다.
둘 사이가 각별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죠. 그리고 정수라 씨와 동서지간이라는 가수 김완선 씨 원래부터 절친한 사이로 후에 정수라 씨가 결혼할 당시에도 김한선 씨가 부케를 받았을 정도인데요.
만약 둘이 동서지간이었다면 이 역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죠.
이런 황당한 루머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던 정수라 씨 그 충격 때문인지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오랫동안 독신으로 지내게 되는데요.
그러다 2005년 후배 가수였던 변진섭 씨의 소개로 사업가였던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골프 라운딩에 나오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는 변진섭 씨의 말에 나간 골프 모임 자리에서 바로 장 모 씨와 만나게 됩니다.
이후 친구처럼 지내게 된 두 사람 그러다 두 사람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되는 계기가 있었으니 평소 어머니와 이모를 모시고 중국 여행에 가보는 게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정수라 씨 그걸 들은 장모 씨가 여행 일정을 모두 짜 놓은 다음 정수라 씨에게 우리 다 같이 중국 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합니다.
이렇게 정수라 씨의 어머니와 이모를 모시고 다 같이 떠나게 된 중국 여행 그리고 여행에 가서도 장 모 씨는 여행 내내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이며 어른들을 공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런 장 모 씨의 모습에 반하게 된 정수라 씨 이듬해인 2006년 약 1년 만에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건설회사의 대표이사였던 장 모 씨 그는 정수라 씨보다 9살 연상으로 정수라 씨는 초혼이었지만 그는 이미 두 아들이 있었던 재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은 두 아들이 한꺼번에 생겼으니 다음엔 딸을 얻고 싶다며 정수라 씨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그렇게 결혼하게 된 두 사람 행복하게 살았다면 좋았으련만 2013년 결혼 생활 7년 만에 두 사람은 이혼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결혼 7년 만인 2013년 8월에 이혼 소송을 하게 되는데요.
사실 이혼 소송이 있기 전인 2012년에 두 사람의 신혼집인 방배동 아파트가 경매에 넘어가고 결혼 전에 정수라 씨가 살았던 이촌동에 아파트 역시 경매에 넘어가는 등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며 이혼의 조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노래하는 가수가 연예인이 뭘 한다고 집이 경매에 부쳐질까요? 예상하시다시피 사업 건설업을 하였던 정수라 씨의 남편 그리고 이뿐만이 아니라 남편인 장 모 씨는 건설회사의 대표이사 직무 정지 상태에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음 배설안에 대표이사 서명을 하는 방식으로 5억 5000여만 원을 편취한 혐의로 2012년 사기죄로 구속이 되게 됩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이런 상황이 되기 전까지 정수라 씨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하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은행에서 집에 빨간 딱지를 붙이려고 하면, 남편이 미리 정수라 씨를 골프를 칠하며 밖에 내보내는 등 사실을 철저하게 숨겼다고 합니다.
결국 남편이 구속이 되는 상황까지 발생하자 그제야 정수라 씨는 상황을 알게 된 것이죠.
그리고 정수라 씨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제대로 된 집 하나 없이 월세로 이사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형편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결국 이혼으로 끝나게 된 정수라 씨의 결혼 생활 법원은 남편인 장 모 씨에게 이혼의 책임을 물어 아내였던 정수라 씨에게 위자료 7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정수라 씨가 위자료를 제대로 받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청수라 씨는 이미 결혼 전에 모은 재산을 모두 잃어버린 뒤였고 남아있는 것은 오직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었습니다.
이혼의 사유가 단순히 금전적인 문제뿐만이 아니라며 부부 사이에 신뢰가 깨진 것이 큰 이유가 되었다는 정수라시 풋날 그녀가 말하길 나는 사랑이었는데. 그는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다 결혼 5년 후에야 남편의 목적이 돈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결혼이 제가 선택한 길 중에 최악이었다. 매일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남자들은 3년까지만 괜찮다 그 이후에는 일만 저질러 놓고 나중에야 그가 달콤한 말을 했던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큰 상처를 받은 정수라 씨 그녀가 결혼생활 7년간 남편에게 사업자금으로 준 돈만 20억 원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상황은 갈수록 안 좋아졌고 신혼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친정 어머니의 집까지 걸린 상황에서 한 번 더 남편을 믿어봤지만 이 역시도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그녀는 마음을 굳힌 것입니다. 그러다 남편은 구속까지 되고 말이죠.
이혼 후 그녀는 모든 것을 잃은 상실감에 라면의 소주만 먹으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아있는 엄마와 언니를 생각해서 마음을 다잡았다고 합니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가수로 데뷔하여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았던 정수라는 다시 그녀가 결혼을 늦게 한 이유는 바로 그녀가 집안의 가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홀어머니와 장애가 있는 언니까지 셋이 함께 살면서 실질적인 가장의 노릇을 했던 정수라 씨 스스로 결혼을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장애가 있는 언니를 자기가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에 말이죠. 그러는 와중에 남편이었던 장 모 씨를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함께 간 중국 여행에서 웃어른을 공경하는 모습에 이 사람이라면 괜찮다라고 생각했던 것이었겠죠.
하지만 그것도 보여주기식 연기였는지 실제 결혼생활과 현실은 달랐습니다.
결혼 후에도 어머니와 언니에게 매달 용돈을 붙여주었던 그녀 하지만 돈도 남편의 사업자금으로 다 날리고 거기에 살고 있는 어머니의 집까지 경매로 날아갈 지경에 이르자 더는 참지 못하였던 것이겠죠.
철들기 전부터 가수 활동을 하며 온갖 루머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결혼은 일종의 도피처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돈도 잃고 사람에 대한 불신만 남은 결혼 생활이라니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혼 후 남아있는 가족을 생각해 다시 마음을 추스린 그녀는 다시 노래와 방송 활동을 하며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