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석과 강호동은 아마도 한국 예능의 역사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손꼽히던 시대의 라이벌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최장수 기록의 프로그램을 두고 경쟁했던 이들은 유재석과 강호동이 아닌 아닌 허참과 송해였습니다.
20세기 한국 예능 최고의 MC로 거론되던 허참은 안타깝게도 설날에 오랜 간암 투병 끝에 향년 73세로 결국 우리 대중들을 떠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라이벌이자 선배였던 송해의 슬픔에도 관심이 쏠리기도 했습니다.
26년 동안 가족오락관을 맡았던 허참은 일찍이 재능이 다분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 드라마에 심취하여 성우 흉내를 내며 사람들을 웃기는데 능했고 일찍이 학창 시절부터 한국 최고의 MC라는 못표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는 군대 전역 후 자신의 명운을 걸고 프로 방송인으로서 도전을 하기 위해 정말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여동생이 결혼 자금으로 모아둔 3만 원을 “성공하면 꼭 갚겠다”는 눈물의 다짐을 하면서까지 말입니다.
그는 MBC 사옥 근처에서 구멍가게를 하던 친구 집에 얹혀 살며 채소나 생선 배달 등의 잡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MBC 방송국을 몇 번이고 쳐다보며 꿈을 키워나갔다고 하는데요.
그는 우연한 기회로 통기타 라이브 클럽에 갔다가 행운권에 추첨되어 관객으로 무대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오히려 담당 MC보다 무대를 사로잡는 입담을 과시하였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이종환이 라이브 클럽에서 단독 쇼를 열어주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운명적으로 당시 MBC PD였던 박원웅이 허참의 라이브클럽 단독쇼를 보고 큰 인상을 받아 그를 ‘청춘은 즐거워’ MC로 스카우트를 하게 됩니다. 이렇듯 허참에 성공의 시작은 단지 얻어 걸린 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일찍부터 준비했던 그의 노력과 열정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시련은 신의 장난같이 닥쳐왔습니다. 1974년 MBC로 진출한 그는 2년 만인 1976년에 일자리를 잃게 된 것 인데요. 왜냐하면, MBC가 모든 프로그램의 사회자를 아나운서로 교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에겐 썩히기 아까운 재능이 있었기에 TBC에서 허참을 7대 가수쇼 MC로 스카우트하였고 이듬해 1977년에 그는 그토록 꿈꿔온 당대 ‘최고의 MC’타이틀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84년에 그의 상징과도 같던 KBS ‘가족오락관’을 담당하며 무려 26년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여성 MC가 21명이 바뀔 동안 허참은 제자리를 굳게 지키며 지금도 그의 ‘몇대몇’이 귓가에 선하게 들릴 정도로 그의 가족오락관은 전 국민이 사랑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허참에겐 30대부터 60대까지 함께 했던 가족 같은 존재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가족오락관’이 26년의 세월을 마치고 사라졌지만 국내 단일프로 최장수 연속 진행 MC라는 훈장은 허참의 은퇴 이후에도 그를 계속 빛나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2019년 11월 그는 이 훈장을 반납하게 돼버리는데요. 바로 ‘전국노래자랑’의 MC인 송해 선생님에게 말입니다. 이 둘은 최장수 연속 진행 MC라는 자리를 둔 라이벌이자 선후배였습니다.
94세의 송해 선생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거든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허참에게 맡기고 싶다”고 말했을 만큼 허참의 인성과 진행 능력을 너무나 좋아했던 선배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보다 22살이나 어렸던 후배 허참이 그것도 자신의 후계자로 가장 유력하게 손꼽히던 사람이 이렇게 허망하게 떠나갔다는 소식에 현재 매우 슬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레 떠나가기엔 이른 73살의 그는 여전히 재치있고 유능했습니다. 즐거워야 할 설날이었지만 아마도 2022년의 설날은 많은 국민들이 그를 기리며 무거운 마음으로 위로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그 두 사람이 만나 지난 회포를 풀고 있을 것 만 같은데요. 오랜 기간동안 한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대중들에게 추억을 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