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와 혼란의 역사 속에서 한 획을 그은 분들이 연예계에도 존재합니다. 그중 가장 격렬한 방식으로 자신의 투지를 나타냈던 사람 바로 배우 안내상인데요.
그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투사가 된 사연 그리고 배우로 전향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그가 직접 언급하였던 설경구, 송윤아와의 관계에 대해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안내상은 명문대인 연세대 신학과 출신이라는 학력으로 ‘반전 매력’을 가진 배우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학력만 본다면 어느 신실한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랐을 것 같지만 사실 안내상의 어린 시절은 지독한 가난과 불우한 환경의 연속이었는데요.
1964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 대구에서 태어난 안내상은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며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판자촌에 정착하게 됩니다.
당시 주변 상황은 무척이나 좋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예의도 없이 선생님께 “아지메요 육성회비 가져왔심더”라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교에 가다 보면 동네 어귀에서 할머니들이 쥐를 구워 먹는 장면까지 목격할 정도로 어려운 시기에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만 9세에 담배를 배울 정도로 어린 아이가 받아야할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 들른 교회에서 처음으로 따듯한 환대를 받게 됩니다.
이후 그 관심이 너무 좋아 중, 고등학교 시절을 교회에서 살다시피 보내며 자연스럽게 목사의 꿈을 꾸게 됩니다.
드디어 받게 된 관심에 신앙심이 활활 타올랐다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목사가 되고자 한 그는 결국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 입학한 그는 엄청난 소용돌이를 마주하게 됩니다. 대학 선배들이 전해 준 사회과학 교재는 그를 종교보다 유물론에 빠지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서 안내상은 자연스레 하나님이 아닌 마르크스의 이론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을 시작하며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고 술에도 빠져들며 점차 사회적 반기를 드는 사람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이후 이른바 언더서클이라 불리던 학생운동 단체에도 몸을 담게 되는데요. 그리고 그는 결국 엄청난 일까지 저지르고 맙니다.
안내상은 1988년 2월 26일 광주 미국 문화원 내에 있는 도서관 진열장에 사제로 만든 폭탄을 설치한 것인데요.
이는 전두환 정권이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유혈 사태로 진압하여 광주에서 수 많은 피해가 있었음에도 미국 정부가 이를 방관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항의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른바 ‘미국 문화원 사건’이었습니다. 다행이도 폭탄은 터지지 않았고 그는 자수를 하게 됩니다. 후에 안내상 본인도 폭탄이 불발되어 다행이라고 반성하고 있다고 하였는데요.
안내상은 본 사건으로 인해 총포-도검-화약류 단속법 위반으로 8개월의 시간을 감옥에서 복역하게 됩니다.
하지만 너무 극단적인 행동이었는지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학생들에게 외면을 받게 된 안내상은 일단 학교로 돌아와 졸업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목사 안수를 받기 보다는 노동자들 곁에서 사회 원동을 하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그들 곁에 가보니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혔고 생각했던 것과는 동떨어진 그들의 현실에 좌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년만에 그토록 열망했던 사회 운동을 접게 됐습니다. 자신의 길이라 믿었던 사회 운동의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닌 것을 마주한 안내상은 이후 오랜 방황을 했다고 합니다.
2019년 <개똥이네 철학관>에 출연하여 당시 상황에 대해 “매일 술에 취해 있고 싶었던 시절”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한 달을 매일 술을 마시고 클럽에 가 스피커 앞에서 마치 미친 사람마냥 막춤을 추기도 하며 애를 썼다고 합니다.
“삶의 방향성을 완전히 잃어버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던 시절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의 고뇌는 굉장히 깊었습니다.
그 당시 같은 과 출신 친구이자 지금도 함께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배우 우현이 “내상아 우리 삶이 아닌 것에 종지부를 찍자”라고 말하며 방황하는 안내상에게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안내상은 갑자기 머리 속을 강타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죠. 아마도 함께 운동권에 앞장서며 생사고락을 한 친구의 진심어린 말에 마음이 흔들린 것 같습니다.
우현이 자신의 삶의 은인이라고 칭하며 그 말을 들은 후 자신의 삶이 달라졌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에게 연기를 해보는게 어떠냐는 말을 한 것을 떠올려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때가 그의 나이 서른이었는데요. 다소 늦은 감이 있었지만 험난한 삶을 살던 안내상에게는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공연예술아카데미 교육생을 뽑는 공고 마지막 날 운명처럼 등록할 수 있었고 그날부터 연기를 배우게 됩니다.
이후 연극 배우로서 대학로 무대에도 오릅니다. 이 때도 우현과 함께였는데요. 당시 우현은 지금의 배우자인 조련을 만났고 안내상도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됐습니다.
1999년 상당히 힘들 당시였지만 함께 극단에서 고생한 아내는 그 어려움을 이해하고 이겨내기 위해 애를 썼다고 합니다.
한 때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해 대학로와 인사동에 호프집과 카페를 운영하며 나름 대박이 나서 연극 배우 치고는 여유로운 삶을 살기도 했었다고 알려졌는데요.
그러던 어느날 문득 오로지 연기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 느껴진 안내상은 모든 사업을 접고 이제는 연극 무대보다는 단막극이나 독립 영화에 매진하게 되었는데요.
2000년 오아시스를 시작으로 그 후로는 드라마와 영화의 조연으로 등장하며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7년 9월에 시작된 SBS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에서 찌질남의 연기를 완벽에 가깝게 소화하며 대중에게 확실히 인식됩니다.
그렇게 유명해진 안내상은 여러 드라마는 물론 예능에도 종종 출연하며 브라운관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막장 드라마의 대모라고 불리는 문영남, 김순옥 작가 작품에는 어느 순간부터 빠지지 않고 출연하고 있을 정도인데요.
아마 다들 아시겠지만 안내상의 여동생과 설경구는 1996년 결혼을 한 사이였습니다. 여동생과 설경구를 맺어준 장본인은 다름아닌 안내상이었는데요.
무명시절부터 인연이 닿았던 안내상과 설경구는 영화 <오아시스>에서 선임 형사와 부하 직원 역할로 다시 만나는 순간이 옵니다.
연기에 대한 열정을 가득 가진 설경구를 좋게 본 안내상이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해 준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동생을 소개해 줄 만큼 두 사람은 믿음이 강했던것 같습니다.
비록 설경구는 끝내 그 믿음을 지키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딸을 낳고 순탄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설경구는 돌연 2006년 이혼을 발표하는데요.
그리고 2008년 동료배우였던 송윤아와 눈물의 기자회견을 하며 두번째 결혼을 발표합니다. 이혼 후 시간이 흘렀기에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설경구 전처의 언니라는 한 네티즌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설경구와 송윤아는 2002년 영화 <광복절 특사>에서 상대역으로 만났고 그 후에는 절친한 동료 배우로 지내다 2006년 영화 <사랑을 놓치다>에서 다시 상대역으로 만나 설경구가 이혼 후 사랑을 키워온 것이라고 밝혔는데요.
설경구 전처의 언니라는 네티즌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이혼 전부터 이혼 전부터 인연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결혼 생활을 잘 유지하고있는 설경구 송윤아 두 사람에 대한 비난이 잦아질 줄 모르는 이유도 바로 이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안내상은 별다른 의견을 내비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2013년 7월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 출연해 진행자인 백지연이 설경구에 대해 묻자 “연극하던 시절 술친구였다”라며 더이상의 교류가 없다는 점을 은유적으로 밝혔습니다.
이어 그는 설경구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하였습니다.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대답이었지만 관계가 끝났다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이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수 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절박한 심정으로 살아온 안내상의 인생이 참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한편 앞으로의 연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