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이 치는 듯한 소식을 들은 서수남 씨 서둘러 비행기를 예약해서 미국으로 가려고 하는데 또다시 미국에서 전화가 옵니다. 환자가 이미 사망했다고 꽃과 좋아요는 명상을 만드는 데 큰 힘이 됩니다.
가수 서수남이라고 하면, 순간 긴가민가하실 분들도 서수남과 하청일이라고 하면, 하면서 단번에 고개를 끄덕이실 분들 제법 많으실 것입니다.
1943년 출생으로 3대 독자인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요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기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생활고의 시골 할머니 집에 맡겨져 자라기도 하였습니다.
1964년 서수남 씨가 결성한 아리랑 브라더즈 원래 사 인의 중창단이었지만 이후 박창학 최용삼이 빠지게 되고 서수남과 하청일 이렇게 듀엣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의 노래 유명한 노래들이 너무 많죠 동물농장을 비롯하여 1971년에 팔도 유람 그리고 1973년에는 수다쟁이라는 노래로 많은 웃음과 사랑을 받기도 하였으며, 또 있었죠.
과수원길 이 노래도 역시 많은 사랑을 받으며 교과서에까지도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모두 오래된 노래들이지만 지금 다시 찾아서 들어보아도 하나같이 정말 좋네요.
컨츄리나 포크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꼭 한번 찾아서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노래의 즐거움을 알려주었던 서수남씨와 하청일 씨 하지만 이후 1988년 서수남 하청일 데뷔 20주년 기념 콘서트를 끝 끝으로 두 사람의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하청일 씨는 사업에 손을 대었었는데 이게 또 일이 잘 풀렸고 이후 사업에 무게를 두다가 1997년 미국으로 떠나 본격적으로 사업에 집중하였다고 합니다.
여전히 서수남 씨와는 연락을 하고 지낸다고 하니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지만 변치 않는 두 사람의 우정이 보기 좋네요.
그럼 그동안 서수남 씨는 어떻게 지냈을까요? 혼자가 된 서수남 씨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하면서 배우 활동을 하기도 하고, 솔로로 음악 활동을 하기도 하였지만 전과 같은 큰 인기를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20년 동안 인기 가수로 지냈지만 그간 벌어놓은 재산이 없었던 서수남 씨는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웠다고 하는데요.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요 서수남 씨는 궁여지책으로 서순암 음악 학원을 만들어 운영하게 됩니다.
서수남 씨가 하는 음악들 기타와 노래를 가르치는 음악학원인 거죠.
운영한 지 이 년쯤 되었을 무렵일까요? 서수남 노래교실은 유행처럼 붐을 일으켰고 주부를 대상으로 한 문화광좌 등에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바로 또 시기쯤 노래방 붐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엄청난 붐이었죠. 당연히 서수남 노래교실의 인기도 수직 상승하게 됩니다.
1주일의 노래 강의만 해도 20개가 넘을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이에 서수남 씨는 큰 돈을 벌게 되어 경제적으로도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고 했었나요?
이제 좀 경제적인 여유가 생겨서 안정적인 삶을 산하했었던 서수남 씨 어느 날 집에 돌아온 서수남 씨는 메모 한 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29년을 함께한 아내가 남긴 메모였는데요. 메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당신과 가족들에게 큰 빚을 남겨놓고 떠난다 빚을 갚아달라 단지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하네요.
안에는 보이지 않고 저런 메모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면 그야말로 얼이 빠져버리지 않을까? 생각이 되는데요.
아무튼 사연인, 즉슨 서수남 씨의 아내가 재테크를 한다고 벌어놓은 돈을 몽땅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상하시다시피 투자는 실패하여 큰 손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몽땅 날리게 된 것이죠.
근데 여기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인데 도박도 그렇고 이런 주식도 그렇고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하다 보니 그만 빚이 10억 원으로 불어나게 된 것입니다.
10억 지금도 큰돈이지만 당시는 훨씬 큰돈이었겠죠. 서수남 씨가 솔로로 활동하게 되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어떻게 또 기회가 찾아와 노래교실로 큰 돈을 벌게 되었지만 어이없이도 한순간에 모든 걸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빚까지 더해서 말이죠. 물론 아내분도 어떻게 재테크를 잘 해보려고 그런 것이겠습니다만 그렇다고 하여도 피해가 너무 막심합니다.
현금을 비롯한 살고 있는 집까지 모조리 날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셋방을 얻을 돈도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수중에는 한 푼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고 하니 절망적인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연예인 가수로서의 자존심이고 뭐고 채권자에게 1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서수남 씨 하지만 채권자는 냉정하게 자리를 떴으며 서수남 씨는 혼자 자리에 망연자실하며 주저앉아 버렸다 다고 합니다.
서수남씨가 이렇게까지 간절했던 것은 그가 혼자의 몸이 아닌 바로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수남 씨에게는 딸이 세 명 있었는데, 당시 모두 결혼을 앞둔 나이라고 하였습니다.
딸들이 이미 결혼만 했었어도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서수남 씨 내가 고생하는 건 괜찮은데 하루아침에 딸들에게 비참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서순암 씨 당시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로 더 이상 이팔 청춘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앞을 봐도 뒤를 봐도 희망은 없을 것 같다는 그런 절망감이 온몸을 휘감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네, 그렇습니다. 정신이 혼란스럽고 마음이 편치 않으면 몸에도 이상이 오기 마련이죠.
건강도 악화되고 대인 기피 증세까지 심하게 왔다고 하니 정말 큰 시련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앞이 안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가면 또 어떻게든 사라진다고 하기도 하죠.
그러면서 살길이 보이면서 희망도 가지는 것이고요. 이팔 청춘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강하다라고 해야 할지 서수남 씨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활동을 하여 빚을 갚아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여유가 생겨가며 아프리카의 고아를 돕는 일도 하며 의미 있는 일도 해나갔던 서수남 씨 이제는 드디어 삶의 안정을 되찾나 싶었는데, 또다시 불행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첫 번째는 먼저 어려운 시절 자신의 버팀목이자 인생에서 가장 존경했던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로부터 얼마 뒤 사랑하는 첫째, 딸이 미국에서 사망하였다는 비보를 듣게 됩니다.
어느 날 뜬금없이 미국의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환자가 술을 많이 마셨는지 위출혈이 됐다고 보호자가 빨리 와달라고 말이죠.
그렇게 벼락이 치는 듯한 소식을 들은 서수남 씨 서둘러 비행기를 예약해서 미국으로 가려고 하는데 또다시 미국에서 전화가 옵니다.
환자가 이미 사망했다고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살면서 겪어온 어떤 고통보다도 말이죠.
딸의 유골은 화물 비행기로 부모님의 품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인천 터미널에 가서 딸의 유골을 안고 오며 생각하길 살아서 부모가 그런 경험을 하면 정말 안 된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내가 죄가 많구나라는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노래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서수남씨 정말 굴곡진 인생을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딸을 그렇게 안타깝게 보내고 현재 대략 5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나 싶은데요.
근래에는 나이를 먹어가니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로운 노년기를 보낸다고 근황을 전하였습니다.
그의 말처럼 앞으로는 슬픈 더 이상 없이 자유롭고 즐거운 인생을 만끽하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