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트로트의 사대천왕 중 한 명인 현철의 부고가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비보가 들려왔습니다. 바로 오늘 아침, 송대관 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입니다. 송대관은 평소 지병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끝내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 활동을 재개할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이 소식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송대관은 많은 굴곡진 인생을 살아왔기에, 마지막까지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픕니다.

송대관은 194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삼일운동 당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고, 이로 인해 일제에 의해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한국 전쟁 중 실종되었고, 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송대관은 어린 시절부터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서울에서 열린 노래자랑 대회에서 입상한 경험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밤학교에 다니며 신문 배달과 이발소 보조 일을 하며 힘든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송대관은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상경했고, 당시에는 무일푼 상태였지만 성공을 다짐하며 검표원을 피해서 무임승차를 하며 서울역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에서 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레코드사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혹독한 무명 시절을 보냈고, 결국 오아시스 레코드 사장인 손진석과 인연을 맺고, 그와 함께 일하며 가수로서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당시 출연료는 매우 적었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대관은 무명 시절을 극복하고, ‘해뜰날’을 통해 인지도를 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송대관은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해뜰날’로 가수로서 정상에 올랐지만, 결혼 후 인기가 급격히 식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결국 송대관은 극장 리사이틀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한때는 잠실에서 분식집을 운영하며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 후, 처가가 있는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초기에는 직장을 찾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송대관은 점차 자리를 잡았고, 샌드위치 전문점과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유가 생기자 송대관은 이유 없이 병을 앓게 되었고, 향수병 진단을 받으며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송대관은 6년 동안 어머니와 단칸방에서 살며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장의 차표로 화려하게 복귀하며, 노래로 다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무임승차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승차권 값을 갚기 위해 많은 돈을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의 인생은 한 번의 큰 성공과 함께 극적인 변화를 겪었지만, 결국 외환위기와 부동산 관련 사건들로 인해 다시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송대관은 많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후배 가수들에게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특히 장기 투병 중인 후배 가수 방실이를 위해 치료비를 지원한 일화는 그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송대관은 후배들을 자신의 동생처럼 아끼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돕는 데 힘썼습니다.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후배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송대관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음악과 후배들을 위해 힘쓰던 진정한 아티스트였습니다. 그의 고통이 이제는 끝났기를 바라며, 하늘에서 평안히 쉬기를 기도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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