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우울증 약을 달고 살다 결국 요양병원에서 쓸쓸하게…” 여자 농구 은메달 김영희 향년 60세 거인병 앓다 끝내 세상을 떠난 안타까운 소식, 그녀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에 모두가 오열을 한 이유

2월의 첫날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여자 농구 은메달리스트 김영희가 행년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전해지며 농구계가 슬픔에 잠겼습니다.

2023년 1월 30일 고위는 긴 투병 생활 끝에 향년 60세의 나이 급성 호흡 부전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63년생 김영희는 생전 한국 농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대한민국의 전쟁 여자 농구 선수였으며 역대 최장신 여자 농구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인 여성 중 최장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현역 때 여자 농구 최장신 이 미터 센터로 이름을 날린 고인은 동주여중과 숭의여고를 거쳐 실업농구 한국 화장품에서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김영희가 속한 한국 화장품과 또 한 명의 레전드 박찬숙이 이끄는 태평양화학의 라이벌전은 남자 농구 못지않은 인기 속에 펼쳐졌습니다. 고인의 활약은 국제 무대에서도 빛났습니다.

테른마크를 달고 천국 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1984년 라 올림픽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등에 나서 국위선양에 앞장섰습니다.

특히 라 올림픽에서 달성한 은메달 쾌거는 아직까지도 한국 여자 농구 역사에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고인은 국제 무대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이후 체육 훈장 백마장과 맹호장 등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올림픽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며 스타로 부상했지만, 농구 코트를 떠난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고통스러운 삶 자체였습니다.

결국 오늘 여러 합병증으로 오랜 투병을 하던 도중 결국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떠나는 마지막까지 그녀는 힘든 생활을 토로하였습니다.

김영희의 한창 전성기 시절이던 1987년 11월 걸인 병으로 불리는 말단비 대증 판정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동을 그만둬야 했으며 전 농구선수 김영애 별 그가 알았던 거인병이란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였음에도 힘든 생활을 이어나가야 했던 김영희의 삶을 되돌아보며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김영희의 한창 전성기 시절이던 1987년 11월 몸과 키가 계속 커져가는 걸인 병으로 불리는 말단비 대증 판정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동을 그만둬야 했습니다.

말단비대증은 뇌하수체 종양에 의해 성장호르몬이 과잉분비되는 질환입니다.

말단비대증이 생기면 뼈 성장으로 앞 이마와 턱이 돌출되고 손과 발 혀와 같은 염부 조직까지 커집니다.

국내에는 2000에서 3500명 정도의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말단비 대증을 방치하면 체내 장기까지 거대해지고, 심혈관 질환 위험이 높아질 뿐 아니라 대장암 등의 발병률이 올라가 사망률이 일반인에 비해 이 3배로 높아집니다.

한 번 커진 골격 등은 되돌릴 수 없어 조기에 진단받고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치료 방법으로는 수술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뇌하수체 종양을 제거한 식으로 진행되는데 뇌하수체의 종양 크기가 작을수록 완치율이 높습니다.

수술로도 종양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면 방사선으로 종양을 태워버리는 치료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계속 크는 것이 거인 병인지조차도 몰랐고 키가 이 미터를 넘으면 유능한 농구 선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춘기 때 치료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86년 아시안게임까지 뛰고 나서 이듬해 11월 훈련 도중 반신 마비가 와서 앞이 안 보여 실명 위기까지 처했었습니다.

알고 보니 끊이지 않고 샘솟는 성장 호르몬 때문에 뇌종양이 생겨머리에 있는 큰 혹이 시신경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올림픽을 마치고 왔을 때도 이미 몸이 엄청 커져 있는 상태로 당시 소속팀 감독은 그녀가 살이 쪄서 온 줄 알았을 만큼 당시에는 병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도 다시 코트에 복귀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당뇨병과 위궤양 등 합병증이 찾아와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그때부터 병마와 싸우기 시작했고, 삶의 전부라 여겼던 농구 코트도 떠나게 됩니다. 농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는 것은 너무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당시 진통제만 하루에 15살 넘게 먹어야 했고 뇌 수술을 받고 나서 외출을 하면 등 뒤에서 사람들이 여자야 남자야 저것도 인간이나 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런 소리가 듣기 싫어서 바로 다시 집에 들어가게 됐고 하루는 중학생 20명이 대문을 두들기며 거인 나와라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 삼에서 4년 정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불안증 우울증이 심해져 밤에 영하 15도까지 내려간 날의 난방도 틀지 않고 문을 열어놓고 혼자 오는 날도 많았습니다.

김영희는 밤이 무서웠어요. 겨울이면 우울증이 더 심해져 삶이 파괴될 정도여서 해서는 안 될 시도까지 했어요라며 결함 끝으로 내몰렸던 아픈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뇌의 종양이 다시 커져서 두 번째 수술을 받았지만 머릿속에 큰 혹 하나는 제거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결핵까지 걸려 이가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결핵은 나았지만 몸 상태가 온전치 못했고 무릎이 아파서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이미 힘든 상태였습니다.

은퇴하고 나서 한국 화장품에서 대리점을 개설해 주었고 몸이 좀 나아지면서 1990년부터 3년 정도 이래 몰두했지만, 아버지가 암에 걸려 투병을 하게 됩니다.

부모님까지 암으로 사망한 안타까운 그녀의 인생 어머니는 딸과 남편의 병간호를 했고 딸 몰래 눈물 흘리며 우리 딸 불쌍해서 어쩌나라고 걱정하며 지내던 중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집니다.

하지만 1998년 뜻하지 않게 59라는 젊은 나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엄마를 따라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시험을 전폐했습니다.

엄마 없이는 살고 싶은 이유도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라는 생각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1년여 동안 생과 사이의 갈림길에 서서 힘들게 지냈습니다.

엄마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에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몸부림치자 세상이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올케와 함께 그녀를 붙잡고 대성통곡하며 제발 죽지 말라고 밤낮으로 애원했습니다.

남동생 때문에 다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은 그녀는 먹을 것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몸을 추스리며 동생 내외와 함께 아버지 병수발을 도왔습니다.

선수 시절 번 돈과 한국 화장품 대리점을 넘기면서 받은 권리금 등은 자신과 부모님의 치료비로 다 써버렸습니다.

세 차례 암 수술을 받았음에도 2000년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무관심하게는 국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공로로 받은 것은 그녀에게 쥐어진 훈장 몇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그녀의 증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됐고 합병증으로 뇌종양 수술까지 받아 오랫동안 투병 생활을 이어왔습니다.

지난 2021년엔 어려운 생활 환경 속에서 투병 생활을 이어가는 모습이 전파를 타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방송에 나온 김영희의 모습은 심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올림픽 은메달로 인한 체육연금으로 매달 70만 원씩 지급되지만 그녀는 이번에는 입원해서 치료비가 많이 나왔는데 어떤 때는 보름도 안 돼서 7000원만 남을 때도 있다라고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으며 또한 후배 농구선수서장훈과 과거 대표팀에서 함께 운동했던 허재 감독이 응원차 돈을 보내줬다 며 정말 마음이 따뜻하고 고맙더라라며 두 사람이 정이 많고 겉모습만 보면 안 된다고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실제 고인의 사정이 알려진 뒤 문화체육관 권부와 허재 서장 등 문구계 스타 등 여러 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음 고인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장애인 봉사를 이어가며 마음을 치유했지만, 결국 병세가 악화돼 이른 나이에 눈을 감았습니다.

부고 소식이 전해진 뒤 농구계는 추모에 나섰습니다.

청주체육관에서 열린 여자 농구청주 킬로바이트스타즈와 부1001 언큐의 경기 시작 전 양 팀 선수단은 고인을 기리는 묵념을 했습니다.

장례식장에 빈손은 따로 두지 않기로 했으며 4일 오전 발인 예정입니다.

그녀에게 큰 키는 축복이었지만 그것은 농구선수일 때뿐이었습니다.

30년 넘게 투병 생활을 하며 제대로 된 생활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디 그곳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아픔도 없이 하고 싶었던 것 없이 하며 편히 쉬시길 바라겠습니다. 삼가 군인의 면복을 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