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한테도 말도 못하고 참고 살았다..” 81세 김상희가 수십년간 말도 못하고 살아온 남편의 충격적인 정체

오늘은 김상희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봅니다. 김상희는 1943년 3월 29일에 태어났으며 현재 80세입니다. 그녀의 고향은 경기도 경성부이며, 부친은 류청, 남편은 유훈근이며 아들이 있습니다. 김상희는 풍문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숱한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린, 일명 뱅 스타일이 트레이드마크로 불리며 여자 학사 가수 1호라는 수식어로 유명합니다. 학창 시절에도 대단한 수재로 인정받았으며 항상 1등을 달성하고 노래 등에서도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집안의 염원대로 고려대학교 법대 법학과로 진학한 이후 1961년에 고려대 법학과 2학년 재학 중 KBS 전속 가수로 데뷔했지만 데뷔 초에는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당시 대학교 재학생이 연예 활동을 하면 퇴학이 불가피한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가수와 탤런트 등은 ‘딴따라’로 천시되어 대학 재학생의 경우 연예 활동은 거의 금지되었습니다. 이화여대는 결혼이나 임신한 학생을 퇴학시키는 엄격한 정책을 가졌던 것처럼 당시 김상희의 경우에도 학업과 연예 활동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결국 김상희는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고, 예명을 사용하는 이유도 자신의 가수 활동을 학교와 가정에서 숨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공개 방송 무대에는 일절 나서지 않고 녹음 방송만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인기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안은 당시 대학생들이 연예 활동을 하기 어려웠던 사회적 제약과 규제를 보여주는 사례이며, 가수 김상희의 특유의 미모와 재능이라는 자원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점에 대한 아쉬움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녀의 이후의 활약과 인기를 얻은 이유를 통해 사회적 환경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당시 김상희는 이 실력을 갈고 닦아서 나중에 아주 유용하게 써먹게 되는데, 바로 최초 여성, 최초 가수 출신 MC가 되기 위한 기반을 여기서 다지게 됩니다. 대학에 합격한 후 우연한 기회에 서울 중앙방송국 전속 가수 모집에 참가해 최고 점으로 합격하는 결과를 얻으면서 가수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명문대생이었던 그녀에게 있어 가수 생활은 집과 학교 양쪽 모두에게 숨겨야 하는 비밀이었고, 이에 ‘상희’라는 예명을 쓰게 됐습니다. 이와 함께 얼굴이 알려질 것을 염려해 공개 방송 무대에는 일절 나서지 않았고 녹음 방송만으로 가수 활동을 해나갔습니다. 이 같은 김상희의 과거 활동을 아는 연예계 일부 관계자들은 “‘얼굴 없는 가수’ 이론은 김상희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이후 1965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가수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김상희는 가진 재능을 펼치며 70년대 후반까지 매년 히트곡을 꾸준히 발표하며 인기 가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국내 여자 학사 가수 1호라는 수식어로 주목받으며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은 국민 가수로서 ‘대머리 총각’, ‘경상도 청년’, ‘금산 아가씨’,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울산 큰애기’ 등이 그녀의 대표곡입니다.

가수 김상희는 또한 전매특허인 뱅 헤어스타일, 짧은 미니스커트 등 시대를 앞서가는 패션을 소화해 가요계의 패션 아이콘으로 불리며 당시 일본, 미국, 홍콩 등의 세계 무대로도 진출해 위상을 떨친 바 있으며 2018년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예술문화공헌 대상 가수 부문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대표곡으로는 1968년 ‘단벌 신사’, 1974년 ‘어쩌나’, 1977년 ‘즐거운 아리랑’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60~70년대 히트곡 제조기였던 김상희는 당대의 실력파 작곡가들과 손을 잡고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대중들의 편애와 함께 지성과 미모, 노래 실력 등 삼박자를 모두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녀의 인기는 높았습니다. 또한 1968년 당시 KBS PD였던 유훈근 씨와 결혼하게 되면서 가수와 PD의 관계로 함께 일을 하면서 연인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유훈근은 전주 지역의 명문 집안의 아들로서 그의 경력은 KBS PD 입사, MBC로 자리를 옮기고 제작국 PD를 거쳐 보도국 기자, 차장, 뉴스 앵커 등을 역임하여 언론계에서 입지를 구축해 갔습니다. 또한 1981년에는 학교법인 시사 학원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 유일여자고등학교를 세우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김상희의 남편 유훈근은 가수와 PD, MC, PD의 관계로 함께 일하게 되면서 연인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유훈근은 김상희의 재능을 알아보고 MC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유훈근은 김상희를 보며 “나이도 어린데 엄청 간이 컸습니다. 깡이 좋았습니다. 배포가 보통 큰 게 아니었습니다”라고 회상하였습니다. MC를 시작한 프로그램은 처음에는 간부들의 반대로 실패 위기를 맞았습니다. 당시 여자 MC는 거의 없었고 가수 출신으로는 더욱 희소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김상희는 노래 실력과 음악 살롱에서의 MC 경험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성공으로 인해 가수 출신 MC, 여자 MC 이후 나오게 된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큰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유훈근은 4선 의원인 유청의 아들이자 종갓집 7대손 장남으로서 양측의 반대가 매우 심했습니다. 종갓집 종손 며느리로 받는 것에 대한 반대가 있었고, 집안의 사업과 위상을 고려했을 때 결혼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훈근과 김상희는 결국 자신들의 결혼에 대한 결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어른들이 오지 않으면 둘이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양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사랑을 이루기로 결심했습니다. 결혼식장에는 양측의 식구들이 참가하고 서로를 며느리와 사위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아들 두 명을 낳게 되었습니다.

유훈근은 KBS에서 MBC로 이직하고 보도부 차장으로 일한 후 정치와 인연을 맺습니다. 아버지가 4선 국회의원이었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1988년에는 전주갑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게 됩니다. 김상희의 음악적인 재능과 탁월한 MC 실력, 유훈근의 정치적인 경험과 가정의 위상이 서로를 보완하면서 그들의 삶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해 나갔습니다. 당시 대다수가 유훈근이 공천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던 만큼 유훈근은 강력한 후보로 인정받았습니다. 특히 유훈근의 아버지가 지역구인 전주갑이었기 때문에 유훈근의 출마는 각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선거 막판에 원에게 뒤집기를 당하게 됩니다. 이는 인생의 황금기인 40대를 김대중 전 평민당 총재에게 바치고 배신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결국 유훈근은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고 평민당 낙천자들의 평민당 복귀 요구에 반대하며 야권 통합의 기수론을 내걸고 평민당을 배척합니다. 그러나 유훈근은 선거 결과 낙선하게 됩니다. 이후 유훈근은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꼈는지 손을 떼고 전문 경영인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김상희는 남편 유훈근이 김대중과 결별한 80년대에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유훈근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방송 출연이 금지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김상희는 무대에 설 기회가 줄어들어 이화여대 옆에 반평(3평) 공간에서 샌드위치를 팔면서 생활고를 겪게 됩니다. 하지만 김상희는 특유의 대인관계 능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갑니다. 그녀는 한국 가요계에서 대인관계가 좋은 여가수로 인정받아 새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성격이 원만했습니다. 이런 자신의 장점을 살려 김상희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활동합니다.

또한 1999년에 최순영은 아들인 유모 씨의 군 면제를 위해 군의관에게 천만 원을 건넨 혐의로 서울지방검찰청에 불구속 기소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검찰에 따르면 최순영은 1995년 8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위치한 은행 지점에서 예비역 대령인 소모 씨에게 아들의 병역 면제 대상 여부를 결정하는 제2국민역 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잘 아는 군의관에게 천만 원을 제공한 혐의를 받았습니다. 이에 검찰은 병역 면제를 받았던 김씨의 아들이 병역 신체 검사를 다시 받게 하도록 병무청에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기소 3개월 후인 같은 해 12월 서울지법은 최순영 씨에 대해 제3자 뇌물교부죄를 적용하고 벌금 1000만 원을 선고하는 판결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를 통해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안은 군 병역에 대한 특권과 뇌물 혐의로 큰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최씨의 아들이 병역 면제를 받기 위해 뇌물을 건네는 행위는 공정성과 동등성의 원칙을 훼손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이와 함께 이러한 사안은 부유한 가정에서 출신한 사람들이 군 병역 의무를 회피하려는 시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사회적 불평등과의 관련성을 논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군 병역에 대한 특혜와 부패에 대한 문제가 다시 한번 크게 논의되었으며 사회적 정의와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아졌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안은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법에 어긋난 행위를 저질렀을 때 그에 대한 처벌이 공정하고 엄정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는 사례로도 평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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