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무심하지 어쩌다가…” 올해 80세 가수 서수남 교통사고로 딸 잃은 안타까운 비보, 결국 극단적인 선택까지….

‘참척’이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비통함을 일컫는 말로,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혹한 슬픔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전 재산을 탕진한 후 잠적해버리고, 사랑하는 딸마저 먼저 보내면서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을 겪어야만 했던 가수 서수남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서수남은 3대 독자이자 무녀 독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지 100일쯤 됐을 때 아버지가 사망하였기에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고 했습니다. 서수남의 어머니는 가수는 나이 들어서 깡통 차는 직업이라면서 그가 가수가 되는 걸 반대하셨고, 서수남은 한양대 화학과를 나왔는데 사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노래하지 말라고 몰래 원서를 넣은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화학과라도 나와야 나중에 비료 공장이라도 취업할 수 있다는 생각이셨고, 결국 딱 몇 년만 가수 활동을 하고 그만두겠다라는 약속을 한 후 그렇게 가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MBC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프로그램에서 하청일과 함께 서수남, 하청일 콤비로 본격적으로 데뷔한 서수남은 1969년 동물 소리를 흉내 낸 동물농장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이후 1971년 팔도유람이라는 곡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1973년에 발표한 수다쟁이라는 곡은 당시 코믹송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975년에는 우리가 잘하는 과수원 길이라는 곡이 유행하며 교과서에까지 실리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서수남, 하청일 듀오는 지금으로 보면 컬투와 비슷한 개그와 노래를 동시에 하는 듀오였고, 무대에서도 노래만이 아니라 개그도 같이 선보이는 형태였다고 했습니다.

서수남이 가수로 데뷔 후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20년이 지난 어느 날 뒤 돌아보니 남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와 함께 듀오로 활동하던 하청일은 이전부터 해오던 스포츠용품 사업이 크게 잘 되어 이미 가수 생활은 부업처럼 된 상황이었고 솔로로 나선 서수남은 발표하는 노래마다 반응이 별로였습니다.

그 역시도 이 노래가 저 노래였고 뭔가 실력이 바닥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노후 걱정과 더불어 시작한 것이 서수남 음악 학원이었으며 그중 노래 교실이 특히 주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했습니다.

입소문을 타고 각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노래 강자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나중엔 일주일에 20회까지 강의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강자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그의 강사비도 천정부지로 솟았고, 선생님 소리 들으면서 주부들 사이에서 서수남 노래 교실에 나가지 않으면 유행에 뒤진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말하길 “이때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등 따습고 배부르던 시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외부 노래 강좌를 다니다 보니, 정작 ‘서수남 음악학원’을 일일이 챙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음악학원의 실장을 맡기고 재정적인 관리를 부탁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2000년 9월 24일 그의 아내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라는 편지만 한 장 달랑 남겨놓은 채 사라지게 됩니다. 확인해 보니 아내는 그동안 잘못된 재테크로 그가 번 돈을 몽땅 날리고 거기에 16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까지 사채로 남겨 놓았다고 했습니다.

당시 그가 말하길 “아내가 처음에는 노후 대비를 위하여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했는데 그게 잘못돼 손해를 보고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고 그게 엄청나게 불어서 16억 원의 빚까지 생겼다고 했습니다.

채권자들이 노래 교실에 찾아올 때까지도 그는 아내의 부채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렇게 현금과 집까지 다 날리고 새 방 얻을 돈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채권자에게 무릎 꿇고 1년만 제발 살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냉정하게도 빚쟁이들은 수시로 서수남의 집으로 찾아와 독촉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겪은 딸들은 대인기피증에 걸릴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내의 투자 실패로 전 재산을 잃어버린 서수남은 한 조각의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사는 게 지옥 같았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그가 운영하던 모든 음악학원도 문을 닫았으며 평소에 “이혼하지 마라.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라고 말했는데 자신이 이런 일을 당했으니 주부들 보기가 부끄러웠다고 했습니다.

그는 당시를 고백하길 “한 조각의 희망도 없이 도저히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고 심지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고 아파트 창문을 열고 밑을 내려다볼 때마다 나쁜 마음을 먹기도 했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그를 잡아주신 분이 그의 어머니였고, 26살에 홀로 된 뒤에 3대 독자인 그를 이렇게 키워주신 어머니 가슴에 차마 대못을 박을 수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매일 침대 옆에서 서수남을 위해 2시간씩 우시면서 기도했고, 삶을 거의 포기하고 폐인이 되어 가고 있는 서수남을 불러 어머니가 말하길 “사람에게 몸뚱어리 하나 있고, 살아 있으면 그게 감사한 것이고 또 못해낼 일이 없다.“라고 하셨으며 처음에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머니의 그 말씀이 서수남 삶의 지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하셨지만, 그가 가장 존경하는 지혜로운 분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는 마음을 다잡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 7년 만에 빚을 다 갚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역경을 딛고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던 그가 정말 안타깝지만, 불행은 다시 한번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시절 자신의 버팀목이자 인생에서 가장 존경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데 이어 미국에서 결혼생활을 하던 첫째 딸까지 교통사고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미국의 병원에서 연락이 왔고 딸의 보호자를 찾고 있다고 했으며 당시 그녀의 딸은 남편이 있었지만, 남편하고 다퉈서 헤어져 별거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병원에서는 한국에 있는 서수남에게까지 연락이 왔고,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위출혈로 위독하니까 빨리 와달라는 전화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 예약을 하고 급히 가려는데, 그런 와중 병원에서 다시 전화가 왔고 딸은 이미 사망했다고 했습니다. 병원의 규칙대로 시신을 화장해서 유골이 화물 비행기로 왔고 인천 터미널에 가서 그 유골을 서수남이 안고 오는데, “살아서 부모가 이런 경험을 절대 하면 안 되며,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벌들을 받나?”라며 마음속으로 정말 많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꽃같이 예쁘기만 했던 딸의 예쁜 미소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으며 그가 살면서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한 사건 중 하나였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서수남이 인생 후반전을 사는 분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며 말하길 “우선 건강해야 한다. 건강하다면 잘 먹고, 잘 자고, 운동 열심히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정신이 건강해야 한다. 사람이 가장 잘못되는 근본 원인을 따져보면 욕심이다. 욕심을 갖지 않고 사는 게 필요하다.

욕심을 조금만 덜면 세상이 편해진다. 남에게 양보하면서 사는 자세도 필요하고, 덕까지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양보하면 아주 편해진다. 하나 더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이고, 감사는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 같다.”라고 했습니다.

서수남에게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그가 대답하길 “내가 가진 작은 재능을 누구에게라도 베풀고 싶다.

저의 재능이 있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베풀 각오이다. 지금 노래를 부르는 건 봉사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하는 일이 늘 즐겁다. 그런데 베푸는 게 아니다. 사실은 그 일을 통해서 내가 기쁨을 얻는 것이다. 요즘은 그런 게 인생의 보람이고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노래 불러주는 게 작지만 큰 보람이다.”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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