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을 보면 베트남의 파병간 남자 주인공이 위험에 처합니다. 이때 해병대가 나타나 구해주는데 주인공은 도움을 준 해병 중 한 명을 보며 한마디를 내뱉습니다. 혹시 가수 남진 아닙니까 이렇게 전쟁에 참전했던 가수 그래서 상남자라 불렸던 남진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남진은 1946년 목포 출생으로 본명은 김남진 현재 나이는 76세입니다. 남진의 아버지 김문옥은 목포 일보의 발행인 사장경 국회의원이었고 목포 최고의 부자 집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집안의 늦둥이자 차남으로 태어난 남진은 어릴 적부터 연극과 음악을 즐겼는데 합송을 잘 불렀던 남진은 목포고를 졸업할 무렵 가수 제의를 받습니다. 당시 남진은 아버지의 판대를 무릅쓰고 영화배우가 되고자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상태였습니다.
20살이던 1900 165년 일 집 서울 플레이보이로 데뷔하지만 실패하고 두 번째 앨범은 반응이 좋았으나 타이틀곡 제목이 퇴폐적이라고 금지곡이 됩니다. 해당 공명은 연애 영번지였습니다. 이렇게 앨범 두 개를 실패한 남진은 고향에 내려와 술만 마셨는데 뜻밖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두 번째 앨범에 있는 울려고 내가 왔나가 히트를 친 것입니다. 사실 이 곡은 트로트라 남진은 부르기를 부끄러워했는데 작곡가가 설득해 간신히 취입했습니다. 이에 남진은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고 1967년 가슴 아프게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MBC 신인가 수상을 수상합니다. 이때부터 남진은 영화배우로도 활약하며 가요계와 영화계를 넘나드는 빅스타의 자리에 오릅니다.
한편, 남진은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에 입대해 집에서 지내며 연예계 활동을 하다가 군 수사 당국에 들통나서 베트남에 강제로 보내줍니다. 사실 남진 외에도 진송남 박일남 등 해병대 소속의 연예인 십여 명이 해병대 간부들의 뼈 아래 혜택을 받던 조직적 군대 비리로 보도되었습니다. 남진은 무릎학도사에서 1969년 나라가 시끄러웠다며 국토방위가 일본인데 어떻게 군인이 사회생활을 하냐고 여론이 난리가 났다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그때 신문 일 면의 톱으로 계속 났다 시끄러우니까 월남을 가는 게 어떻냐고 해서 가게 됐다고 베트남에 가게 된 사연을 털어놨습니다. 한편, 베트남에 가니 선임들이 적어 한국에서 노래나 하고 놀다 왔으니 고생해 봐라 해서 정말 고생했다고 말했습니다. 남진은 최선을 다해 이 년간 월남에서 복무합니다.
이후 1971년 남진이 제대를 했는데 일생의 라이벌 라훈아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남진이 내놓은 마음이 고와야지로 폭발적인 사랑을 받게 되면서 국내 가수 최초로 서울시민회관에서 공연하고 컴백사 개월 만에 TBC 남자 가수상과 MBC 최고 가수상을 받습니다. 한편, 마음이 고와해지는 로큰 노래 컨트리풍이 가미된 곡으로 그가 독보적인 캐릭터로 인정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잘생긴 얼굴 엘비스 프레슬리를 떠올리게 하는 창법과 무대 퍼포먼스의 배우 활동까지 당시의 소녀 팬들은 남진에게 열광했고 이후 그대여 변심하오 님과 함께 같은 대표곡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남진은 1972년 나훈아 피습 사건의 진범이라는 루머가 퍼지면서 경찰 조사를 받습니다. 결론은 정신질환자의 범행이었는데.
남진이 자는 동안 집에 침입해서 나훈아를 죽이면 돈을 줄 거냐라고 물어 거절했으나, 훗날 나훈아를 피습하고 이후로도 남진의 고향 집에 불을 지르는 등의 행동을 합니다. 이런 난관에도 남진은 나훈아와 함께 가요계의 쌍벽으로 군림합니다. 라이벌 9도였지만 두 사람은 대중성과 음악성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함께 성장합니다. 그러다가 남진은 1976년 가수 윤복희와 결혼하면서 충격을 안기는데 이 결혼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1979년 남진이 윤복희를 내쫓고 폭행했다는 루머가 돌면서 남진은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는데요. 훗날 윤복희가 남진은 피해자였다고 고백하면서 진실이 밝혀집니다. 사실 윤복희는 1967년 초미닛 스커트로 신세대 여성들의 워너비 스타이자 운 남성들의 흠모를 받았는데요.
총 두 번의 결혼을 했다고 알려졌는데 1968년 가수였던 유지용과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합니다. 이후 75년도에 한국에 들어와 윤복희 특집 쇼를 하는데 공연 후 미국에 돌아가니 남편이 신문을 내미는데 윤복희에 대한 남진의 사랑 고백이었습니다. 이 일에 대해 윤복희는 결혼 생활 동안 남편과 갈등이 있었고, 남편 보라고 고백 한 사람의 순정을 이용했다. 사랑한 게 아니니 이용이었다고 말하는데요. 결국 윤복희는 1976년 남진과 결혼 1979년 이혼한 것으로 세간에 알려집니다. 하지만 윤복희가 방송에서 말하길 결혼 6개월 만에 남진에게 미안하다 없던 일로 하자고 한 후 결혼반지를 돌려주고 갈라섰다고 합니다. 이유는 윤복희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첫 남편의 얼굴만 떠올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진은 윤복희를 이용했다는 루머부터 어떻게 연약한 여자를 때리냐 또는 온갖 욕을 먹었는데 해명 없이 모든 비난을 뒤집었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 만에 윤복희의 고백으로 오해가 풀리자 남진의 지인은 당시 인기스타로서 리스크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로서 윤복희를 최대한 배려하기 위해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남진과 윤복희는 합법적인 결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윤복희의 주장에 따르자면 1976년 친오빠 문제로 귀국했는데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남진이 약혼하자며 다이아 반지를 가져왔어요. 그러면 안 됐는데 반지를 받았고 자리에서 약혼했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남편이랑 이혼도 안 했는데 무슨 결혼이오라며 자신은 당시 유부녀였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남편에 대한 서운함으로 윤복희는 덜컥 남진의 청혼을 받아들이다. 보니 훗날 자신을 남진을 이용한 나쁜 여자였다고 고백합니다. 즉 윤복희는 전남편과 1985년까지 결혼 관계를 유지했기에 중간에 남진과의 결혼과 이혼은 무효입니다. 결국 윤복희는 한 번에 결혼과 한 번에 동거를 한 것입니다. 한편, 1970년대 후반부터 남진과 나훈아는 둘 다 결혼과 이혼으로 인기가 하락했고 조용필 등 후배 가수들이 대거 등장했으며 특히 남진은 부친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신군부로부터 방송 출연정지라는 핍박도 받았습니다. 이런 생활에 지쳤는지 남진은 미국으로 떠납니다. 남진은 미국에서 소개로 재미교포 여성을 만나서 1980년 결혼하여 삼녀 일 남을 낳았습니다. 이후 남진은 가수로서의 전성기는 되찾지는 못하지만 두터운 팬층에 힘입어 꾸준히 방송과 콘서트 활동을 합니다.
그러다 돌연 남진의 아내가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딸 세 명의 대학 입학을 위해 브로커를 동원했다는 혐의였는데 대학 부정 입학이 2001년 새벽들을 뜨겁게 달구던 사건이었습니다. 경찰 조사에서 남진은 몰랐던 것으로 밝혔다. 늦었지만 이 일로 눈총을 받았습니다. 이후로 20년이 흘렀고 사이 딸들도 시집을 가서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 암진은 둥지에 나야 나 등 신국을 발표하면서 활동 중입니다. 게다가 최근 보이스트롯 트롯신이 떴다 트롯 전국체전 등의 트로트 오디션에서 심사위원으로 등장하는데요. 그는 참가자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점수도 상당히 호하게 주는 등 심사위원들 중 독보적으로 관대한 모습을 종종 보여주면서 또 다른 전성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실 6,70 년대를 폭미했던 원조 오빠 남진은 인기 절정이던 시절에 군대 비리 윤복희 폭행 심지어는 동료인 나훈아의 피습을 사주했다는 루머에 시달렸습니다. 그런 악소문에도 곳곳이 57년간 활동을 해온 남진이 대단해 보입니다. 앞으로는 가짜 뉴스나 루머에 시달리는 일 없이 건강과 열정이 있는 한 좋은 활동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