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청춘’ ‘영등포의 밤’ 등으로 1960년대를 풍미한 원로가수 오기택 씨가 23일 오후 지병인 뇌출혈 투병 중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향년 83세였는데요. 저음의 마법사라 불리며 중후한 목소리의 가수였습니다.
그는 1961년 그는 제 1회 KBS 직장인 콩쿠르의 동아백화점의 대표로 출전하게 되어 창작곡 ‘비극에 운다’로 1등을 차지하게 됩니다. 보통 아마추어 콩쿠르라 하면 관객이나 심사위원들에게 친숙한 곡을 부르는 게 일반적인데 오기택 님이 창작곡으로 출전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대회를 TV중계로 지켜보았던 작곡가 김부해 씨 당시 그는 ‘대전블루스’ ‘댄서의 순정’ 등으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스타 작곡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오기택 씨를 보고 한 걸음에 만나러 찾아온 것인데요.
그렇게 실력을 인정받은 오기택 씨는 곧바로 김부해 씨가 문예부장으로 있던 메이저 음반사 ‘신세기’에 전속 가수 계약을 맺게 됩니다. 음반 취입 없이 테스트만으로 전속이 된 매우 독특한 케이스로 그만큼 당시 오기택 씨의 음악적 역량은 특출났습니다.
1962년 계약금 5000원을 받고 전속 가수가 된 오기택은 ‘우중의 여인’, ‘영등포의 밤’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신세기 음반사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하였는데요. 특히 그를 스타로 만들어준 노래는 바로 ‘영등포의 밤’이었습니다.
산업 현장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당시 서민의 꿈과 애환이 담긴 그런 노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는데요. 이후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이 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훗날 ‘영등포의 밤’에 노래의 무대인 서울 영등포구에서는 이 노래를 기리는 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히트곡을 내며 큰 주목을 받았던 오기택 그는 얼마 뒤 해병대 군에 입대하며 군 복무를 하게 되는데요. 그가 군대에 갔어도 TV와 라디오에는 계속해서 그의 노래가 들렸고 군 복무 중에도 틈틈이 음반을 취입하여 공백기 없이 계속해서 히트곡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 제대 후 ‘고향무정’, ‘아빠의 청춘’, ‘남산 블루스’, ‘충청도 아줌마’, ‘비 내리는 판문점’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그야말로 1960년대에 최고의 인기 가수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그는 노래 외에 골프를 좋아해 트로피가 벽면을 채울 정도라고 하는데요.
그리고 그가 골프 말고 좋아하는 또 한 가지는 바로 낚시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낚시 때문에 그의 인생이 또 한 번 바뀌게 되었습니다. 굉장한 낚시광이자 낚시꾼이었던 오기택 그는 1996년 12월 31일 새해 맞이를 겸해 추자도의 무인도 ‘염섬’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엄청난 폭풍이 몰아쳐 섬에 고립이 되고 말았고, 그렇게 거친 폭풍 속에서 갑자기 몸의 빈혈 증세가 찾아와 왼쪽 팔과 다리에 마비 현상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후 무려 24시간 이후 다음날 낚시꾼 배에 의해 구조되어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생명을 구할 수 있었지만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는데요. 너무도 치열하게 생과 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탓일까요? 이 사고로 인해 그는 반신불구가 되고 맙니다. 이후 십여 년 동안 각종 재활 훈련을 통해 차츰 건강을 회복하는가 싶었지만 최근 증세가 악화되어 자택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오기택은 자신의 고향인 해남을 지극히 사랑했다고 하는데요. 평생 미혼으로 지낸 고 오기택 님은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고향 후배들을 위해 ‘해남고등학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고인이 얼마나 고향에 대한 애정이 깊었는지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해남에서는 2007년부터 매년 오기택 전국 가요제가 열리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2018년에는 오기택 노래비까지도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윽하면서도 중후한 저음의 목소리로 서민들 애환을 노래하였던 가수 오기택 님 그리고 가수들의 친목과 권익을 위해 힘썼던 고 오기택님 그는 떠났지만 그의 노래는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을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