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트로트를 거론할 때면 언제나 함께 따라오는 단어가 있죠. 바로 뽕짝인데요. 1970년대부터 생겨난 이 단어는 사실 트로트를 비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됐었습니다.
흔히 트로트베이스에 전자음악을 혼합한 BPM 140 이상의 빠른 비트로 흥을 돋우는 음악을 꽁짝이라고 부르는데 듣는 사람에게 좋으면 그만이지만 정통 트로트 가수를 자칭하는 일부 가수들의 경우 뽕짝과 트로트의 급을 민감하게 나누곤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트로트는 고차원적이고 수준 있는 반면, 뽕짝은 상업성이 짙은 싸구려 음악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런 분위기가 실제 잘 드러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트로트계의 레전드 반열이 있는 태진아와 뽕짝의 선두주자 이 박 사이에 벌어진 일명 이 박사 개무시 사건인데요. 2014년 엠넷에서 기획한 트로트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트로트엑스에 이 박사가 참가자로 등장하자 심사위원석에 있던 태진아가 썩은 표정을 지었는데요.
그 모습이 방송에 그대로 송출된 것입니다. 앞서 태진아는 이 박사의 면전에 대고 이 박사는 정통 트로트 가수가 아니며 그저 광대에 불과하다는 인격 모독적인 발언을 한 적도 있습니다.
이 박사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건지 대체 트로트가 뽕짝보다 얼마나 뛰어나길래 사람 면전에 대고 그렇게까지 개무시를 했던 걸까요?
이 박사를 향한 태진아의 거부감은 비단 뽕짝 장르만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박사는 국내보다 일본에서 먼저 이름 알린 원조 한류 스타입니다.
1998년 당시 우리나라가 IMF로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신바람 이 박사가 등장해 테크노 뽕짝으로 대중을 흥분시켰습니다. 경제난으로 시름에 잠겼던 때 이 박사의 신나는 음악이 국민에게 큰 힘이 되어 주곤 했는데 이 박사는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을 정도로 악기 연주회도 능통한 가수였습니다.
하모니카 기타 드럼 키보드 등 뛰어난 연주 실력은 물론 작곡과 프로듀싱도 직접 도맡아 했는데 이런 이 박사에게 역대급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1995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큰 음반 시장을 가졌던 일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인데 일본의 소니 뮤직이 이 박 사의 비범한 재주를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처음엔 1년 계약이었지만 발표하는 노래마다 대히트를 기록하게 됩니다.
잇따른 히트로 계약 기간이 2년 3년으로 늘어나 총 6년간 일본에서 활동했습니다. 드라마 겨울연가로 대표되는 한류 현상 이전에 일본에서 공연했던 한국인 가수는 조용필과 이 박사 딱 둘뿐이었습니다.
보아 동방신기보다도 한류에 앞장선 장본인입니다. 당시 현란한 복장의 한국인이 나와 일본의 앵카 비슷한 무언가를 사이키 델릭하게 부르는 모습은 일본 젊은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열도는 금세 이 박사에게 열광했습니다. 그의 뽕짝 앨범은 그야말로 태박 음반이 워낙 잘 팔리다 보니 이 박사 음반만 따로 판매하는 매장이 생겼을 정도였는데요.
CF 출연은 물론 인기가 너무 많아 길거리를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기에 힘입어 일본 가요 대상 신인상까지 수상하는 명예를 안게 되는데요.
한국에서는 중장년층을 상대로 노래하던 그가 일본에서는 2030 세대에게 강력한 지지를 얻어 이 박사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도쿄 부도칸에서 공연했다는 건 일본에서 정상급 아티스트로 인정받았다는 물증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이박사를 그저 뽕짝 가수로 저평가 받았지만 일본에서는 천재 음악가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게됩니다.
일본에서 뽕짝이 트로트의 한 장르로 자리 잡자 일본에서는 한국의 다른 트로트 장르에도 관심을 갖게 됐고 따라서 이 박사가 다른 트로트 장례 가수들의 일본 진출을 도운 셈입니다.
일본에 올라오던 이 박사의 영상엔 한국인에게 흔히 붙는 비하나 욕이 전혀 없이 클린했는데 영상 제목에 붙는 태그부터 한국을 싫어하는 나도 인정하는 한류 슈퍼스타일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는데요.
2001년 일본에서의 높은 인기를 뒤로 한 채 활동 무대를 국내로 옮겼는데 몽키 매직 연맹을 스페이스 환타지를 잇따라 히트시키더니, 대학 공연과 전국 라이브 투어를 하며 국내에서도 알아주는 가수로 인기몰이를 하였습니다.
당시 이 박사는 대학 축제 섭외 1위로 지금의 싸이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스스로 한창 떴을 때 다치지만 않았으면 100억 이상 벌었을 것이라 말할 정도인데 당시 주말이면 행사비 2000만 원짜리가 하루에 두 세 건씩 있었다고 하니말이죠.
반면, 이 박사를 까기 바쁜 태진아는 큰 기대를 안고 일본에 진출했다. 개망신만 당하고 돌아온 경험이 있습니다. 이때도 태진아는 이 박사를 짓밟으려는 등 한국의 정통 트로트를 일본에 보여주겠다는 큰 꿈을 안고 일본으로 날아갔는데 폭삭 망했고 사인회에는 단 두 명밖에 오지 않는 대굴욕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태진아와 이 박사가 일본 진출한 시기는 달랐지만 인지도 없던 시작은 같았는데 결과는 극과 극이었는데요. 태진아는 자신이 취급하지 않는 일개봉짝 가수가 본인이 하대받은 일본에서 엄청난 대우를 받고 왔으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가 이 박사를 비난함에 있어 더 황당한 건 태진아 본인도 과거 봉짝 앨범을 발매했었던 건데 과거에는 무명 트로트 가수들이 메들리 음반으로 가수 생활을 시작하곤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유명 트로트 가수들이 이런 메들리 음반을 내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태진아 역시 끝내주는 디스코 메들리라는 앨범을 무려 세 장이나 발매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박사의 노래가 뽕짝이네 싸구려 내 비난할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요.
태진아는 앞서 언급했듯 태진하는 이박서를 향해 트로트 가수가 아닌 광대일 뿐이라는 말로 상처를 준 바 있는데, 2014년 자신이 심사위원으로 있는 엠넷트로트 엑스 프로그램에 이 박사가 참가자로 나오자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였습니다.
태진아뿐만 아니라 함께 심사위원석에 앉은 많은 후배 가수들이 질타를 받았는데 아무리 방송이라 한들 까마득한 후배 가수들이 선배 가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재끼고 삿대질하는 모습이 무리하기 짝이 없었죠. 똥금기가 심한 가수판에서 후배들이 최소한의 호칭도 없이 이박사거리는 것이 얼마나 그를 무시하고 일개 광대로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태진아였다면 심사위원들이 오 태진아 아냐 할 수 있었을까요? 수많은 멸시와 무시해도 뚝심 있게 자신만의 장르 음악을 한다는 건 존경받아 마땅한 진정성 있는 음악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은 신세대 트로트 가수들이 자신들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개발하지 않고 기존 선배들이 해온 트로트에 그냥 박자만 빠르게 바꾸거나 기존 히트곡의 변주나 복제에 그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박사라는 가수가 범죄자 태진아에게 무시받을 가수가 아닌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