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주인공 배우 엄앵란은 하객만 3천 명이 몰렸던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며 54년 동안 부부로 살아왔지만 39년간 별거를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때 故 신성일이 사랑했던 여인이 세상을 떠나자 두 사람은 함께 천도재를 지내며 마지막 가는 날까지 함께 하지 못했던 엄앵란 그녀의 누구보다 파란 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가정을 돌보지 않은 유랑 벽의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살람을 꾸렸지만 판자촌에서 간신히 허기를 면할 정더로 어려웠고 6.25 전쟁까지 발발하자 대구로 피난을 떠난 뒤 갖은 고생들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훗날 살다가 힘들고 어려울 때는 피난 시절을 생각하는 게 당시 대구 방촌 시장에서 어머니와 길가에서 떡장수를 했는데 어린 마음이었지만 너무 힘이 들어 생을 마감하고 싶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겪어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또한 그때 그토록 무서웠던 가난이 평생 간직한 행복의 씨앗이 되어 훗날 배우가 되어서도 너무 힘든 일이 많아 도망가고 싶을 때 생각이 났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는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당시 여유가 없었던 형편 때문에 어머니가 대학 진학을 반대했지만 숙명여자대학교에 합격하면서 1950년대 고대하던 대학생이 되게 됩니다.
하지만 진학의 기쁨도 잠시 등록금이 걱정이던 그녀는 어떻게든 돈을 구해야 했고 그러다 마침 아르바이트 생을 구하던 영화사 사무실에 방문하면서 그녀의 인생이 180도 변하게 됩니다.
그녀가 하려던 일은 영화사 사무보조 아르바이트 였으나 영화감독이 그녀를 눈여겨보며 영화배우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여 카메라 테스트 제의를 받고 1956년 영화 단종애사로 배우 엄앵란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데뷔와 동시에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되어 이후부터는 시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청춘 영화의 아이콘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당시 유혹도 참 많았는데 저녁을 같이 먹자는 소위 고위층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중앙정보부에서도 오라고 했으나 당시 그녀의 어머니가 딸이 지금 배앓이를 하고 있다면서 모두 막아주곤 했습니다.
여자 연예인들을 다방 마담으로 보고 종아리부터 훑어보는 게 너무 싫었던 그녀는 본인이 연예인의 값어치를 올리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바쁜 스케줄 속에서 이 악물고 대학까지 졸업하자 그녀는 한국 여자 연예인 중 1호 대학 졸업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녀는 청춘 영화의 아이콘과 더불어 최초의 학사 출신 배우라는 이미지까지 얻어 그야말로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되었고 1960년 한 살 연하의 잘생긴 신인 배우 故 신성일과 만나게 됩니다.
그녀가 워낙 대 스타다 보니 신성일은 감히 말도 붙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촬영이 지루했던 그녀가 미스터 신 나 너무 졸려 라고 했더니 한강 모래밭에 오토바이를 끌고 오는 장면에서 자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튿날 병문안을 갔더니 링거를 꽃고 그녀에게 윙크를 날리는데 알고 보니 촬영이 지겹다는 그녀에게 촬영 펑크를 내서 쉬게해 주려는 잔꾀를 냈던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후 전무후무한 황금의 콤비스타로 수많은 작품에서 함께 활동했고 그러다 어느 날 호텔 옆방에 자던 신성일이 고층 홈통을 타고 남몰래 엄앵란 방에 들어가면서 두 남녀는 부부의 연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후 두 사람은 연예인 결혼 사상 가장 많은 3천여 명의 하객들 앞에서 결혼을 했지만 신성일은 결혼 전 총각 시절부터 숱한 여배우와 염문을 뿌리는 바람둥이로 아주 유명 했지만 그걸 알면서도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과 동시에 그녀는 연예계를 은퇴하고 이후 10년 동안은 오로지 집에서 살림만 하게 되었고 그러자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 그녀를 부러워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후배들의 승승장구 하는 모습과 집에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비교하면 심각한 우울함이 찾아오곤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심각한 고부 갈등까지 겪게 되는데 당시 그녀는 그동안 번 돈을 모두 친정에 두고 왔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시어머니가 사사건건 개입을 하게 된 것이였습니다.
훗날 그녀의 고백에 따르면 그 스트레스로 결국 이후부터 살이 찌게 되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때 시어머니가 신랑의 속옷까지 검사를 하고 외출을 못하게 하는 바람에 3년 동안 꼼짝 없이 집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엔 니네 집으로 가라고 하는 바람에 아이를 데리고 무려 6개월을 친정에서 산 적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젊은 시절 마련해 놓은 돈으로 시어머니께 집을 사드리고 나서야 마침내 3년 만에 분가를 하며 시집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도도 잠시 뿐 이후부터는 바람잘날 없는 신성일의 바람기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되게 됩니다.
신성일은 34살 때 볼링장에서 처음 만나 첫눈에 반한 동아방송 아나운서이자 여배우였던 故김영애로 당시 신성일은 세 아이의 아빠임에도 김영애와 앞뒤 재지 않고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훗날 신성일의 책에 따르면 두 사람의 밀애가 적나라게 밝혀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김영애가 신성일의 아이를 가졌지만 톱스타인 신성일에게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해 스스로 지웠다는 내용입니다
신성일이 고백하길 친구가 하는 영화사 사무실에서 국제 전화를 받았는데 영애가 임신을 했다고 하였으며 순간 머리가 띵해서 대답을 못하고 한참을 있다 영애가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합니다.
그 후 1년 동안 연락이 없다가 신문에서 내가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독일로 날아와 내가 묵는 호텔 프런트에 메모를 남겨서 극적으로 재회했는데 당시 영애는 삭발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수척해진 모습을 보니까 그동안 내가 얼마나 남자 답지 못했는지 알겠다며 결국 그날 죄책감에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되도록 펑펑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두 달 동안 유렵을 휘저으며 이별 여행을 했고 그러다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엄앵란에게 김영애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신성일은 그렇게 떠날 줄 알았으면 더 잘해줄 걸 하고 혼잣말을 하자 엄앵란이 화를 내며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신성일의 외도는 아내인 엄앵란에게는 당연히 불쾌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훗날 그녀는 신성일이 재미삼아 들어간 역술원 집에서 구천을 떠돌고 애타는 영혼을 달래주는 천도재를 지내야 한다고 하자 신성일의 옛애인 김영애를 위해서 천도재까지 지내주곤 했습니다.
이후에도 신성일은 다른 여자 만나느라 난리 영화제작한다고 난리 극장 짓는다고 난리였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심각한 것은 바로 정치한다고 난리였습니다.
사실 신성일은 故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정계 입문을 노렸으며 5공화국 시절인 1981년 11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갔지만 3위로 낙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성일은 법에 따라 본명인 강신영으로 선거에 나갔는데 유권자들이 배우 신성일인지 몰라서 표를 안 주는 바람에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결국 국회의원 낙선한 후폭풍으로 선거 바로 다음 날 돌아온 당좌수표를 막지 못해 부도를 내자 이들 부부는 하루아침에 쫄딱 망해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때 신성일이 빚더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한강변의 장소를 찾아 다니기 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빚쟁이 4명이 그녀의 아파트에 몰려와 채무지불각서를 쓰라며 달려들자 당시 혼자 집에 있던 엄앵란이 거친 빚쟁이들과 마주 앉아 담담하게 말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보는 앞에서 제가 여기 15층 아파트에서 하늘나라로 가겠습니다 라고 하자 결국 빚쟁이들 중 가장 나이 많은 분이 그녀의 말을 듣고 이 사람도 시간을 줘야 돈을 벌 것 아닌가 하고는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연달아 또 다른 악재가 터지게 되는데 당시 신성일이 협회장으로 있던 배우협회에서 그가 선거 준비로 신경을 쓰지 못한 사이 한 간부가 운영비 수천만 원을 빼돌리게 된 것입니다.
신성일은 사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은 협회장인 그에게 돌아왔는데 결국 이때 벌금행이 내려졌는데 그는 억울했는지 감옥행을 각오하고 몸으로 때우겠다고 말을 했지만 결국에는 감옥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아내인 엄앵란이대신 벌금을 냈기 때문인데 그렇게 남편 신성일이 끝없는 추락을 하자 한때 밤무대의 거물들이 밤무대나 출연하라며 그에게 백지수표를 쥐어 주었고 사실 이때 큰 유혹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선배 박노식 독고성 최무룡이 밤무대에 서고 망가지는 걸 알고 있었던 신성일은 끝내 밤무대에 서지 않게 됩니다.
남편이 낙선하는 바람에 쫄딱 망한 그녀는 막상 생활고를 해결해야 하는 형편이다 보니 나라도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대구에 내려가 비빔밥 장사를 하게 됩니다.
장사를 시작하고 나서는 자신이 배우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어떻게든 살아님기 위해 무려 18년간 비빔밥 장사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녀가 결혼 후에는 일체의 연예게 활동을 접고 비빔밥 장사로 18년을 보낸 뒤 1990년대가 되어서야 아침마당 에서 부부문제 상담코너의 패널로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많은 시청자들이 왕년의 청순한 이미지만 간직하고 있다가 후덕한 식당 아줌마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고 돋보였던 톱스타의 모습은 완전히 지워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는 수다 쏨씨는 그야말로 일품이라 곧바로 안방에 먹혀들어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이것이 남편을 국회의원에 당선시켰던 주된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녀의 토크의 배경에는 남편 신성일이 있었습니다.
훗날 신성일의 고백에 따르면 아내 엄앵란이 아침마당 등에서 패널로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했습니다.
출연자들이 하나같이 남들이 다 아는 거짓말에 내숭을 떠는데 제발 당신만은 그러지 말고 남편 험담 같은 것도 마음껏 하라고 하자 나중에는 신성일은 어느 순간 국민 밉상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녀가 TV에 나와 사람들로부터 많은 공감과 사랑을 받게 되자 덩달아 남편 신성일도 마침내 세 번의 도전 끝에 2000년 제 16회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가던 2004년 뇌물수수를 하는 바람에 임기가 만료된 후 실형을 선고 받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남편의 구속과 함께 아내인 그녀도 잠시 방송을 떠나면서 또다시 진흙탕 속에 빠지게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위로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평생을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고생하던 그녀는 비로소 교도소에 들어 가서야 남편의 사랑과 생에 최고의 선물까지 받게 됩니다.
한번은 면회를 갔는데 교도관이 불쑥 그녀에게 장미꽃을 주자 팬의 선물로 여겼으나 알고 보니 남편이 결혼기념일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습니다.
이처럼 남편은 자유롭지 못한 신분임에도 그녀를 위해 교도소 정원의 장미꽃을 꺾어 철창 넘어 교도관을 통해 전해줬고 이런 로맨틱한 행동에 감동한 그녀가 남편과 철장을 사이에 두고 오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로맨틱도 잠시 2011년 신성일의 자서전 출간 기념회에서 김영애와 나눴던 사랑 등 스스로가 과거사를 여과없이 공개하며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켜 한동안 연예계가 그의 과거사로 들썩였습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그녀가 시사 프로에 나올 때마다 요즘 여자들은 너무 쉽게 이혼한다 참고 살아야지 나라면 6번은 이혼을 해야 했다라는 발언을 수시로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사실임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신성일의 자서전 공개로 엄앵란은 국민 보살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됩니다. 그러다 2015년에는 건강 프로그램 나는 몸신이다 촬영 중 검진을 받다가 유방암을 발견하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만 다행으로 조기에 발견돼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 그리고 이때 그녀가 본인은 80에 가까운 고령이라 암이 생길수도 있단 발언으로 오히려 주위를 안심시키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간 40년 가까이 별거를 하며 사실상 졸혼에 가까운 사이로 지내다가 엄앵란이 아프다고 하자 남편 신성일이 미안했는지 손수 정성어린 뒷바라지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동안의 행보에 대한 논란도 사그라지면서 대중들로부터 애증어린 공감까지 얻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때 이와 관련해 막내딸 강수화 씨의 인터뷰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실컷 놀다가 엄마가 유방암에 걸리니까 집에 들어오겠다는 거다 못 들어오게 하면 서운해 할 테고 같이 살면 몇 십 년을 떨어져 살았는데 갑자기 어떻게 살겠냐는 말을 하였습니다.
또한 아빠는 인터뷰에서 자꾸 애인 이야기를 하고 언론에서 말 안 해도 될 것을 굳이 말하며 자서전을 썼을때도 과거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했는데 앞뒤 다 빼고 그 인터뷰만 나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엄마와 내가 3개월간 밖에도 못 나갔다 결국 내가 엄마에게 아빠는 이미 애인도 있는데 왜 엄마는 서류상은 그냥 놔두면서 왜 이러고 사냐 깔끔하게 이혼하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엄앵란은 배우들이 몇 개월 못 살고 이혼하는 선배들을 봤기 때문에 그런 딴따라의 이미지를 깨겠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가정은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뒤 남편 신성일이 폐암 3기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워낙에 건강했던지 다행히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2주 전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참석을 하며 건재함을 보여주는 근황을 전했지만 안타깝게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엄앵란은 남편 상태가 심각하다고 하여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데 창밖에는 산천초목이 보이면서 그 사이 희로애락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더라 문득 나는 신성일에게 잘한 것이 있나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부족하니 밖으로 돌지 않았겠나 그래서 그 죄를 어떻게 씻을까 하다가 발이라도 씻겨줘야 겠다고 싶어 세상 뜨기 사흘 전 발을 씻겨 주었는데 그게 마지막으로 본 것이였다고 합니다.
87세 엄앵란 갑자기 자취를 감춘 안타까운 이유! 죄를 어떻게 씻을까 세상 뜨기 전 마지막 모습 – YouTube